춘생문

by 별사탕

시종원 시종, 임최수는 그날 밤을 기억했다.


경회루 너머 한 줄로 이어지는 하나의 담장을 넘어가면 사정전, 교태전, 강녕전으로 이어졌고 그 뒤편 흥복전 집경당을 넘어가면 향원정 건청전이었다. 벌건 화광이 10월의 북쪽 새벽하늘 위로 너울거렸다.

신식총으로 무장한 훈련대와 친위대가 벌써 강녕전을 둘러쌌고, 착검한 그들의 칼끝이 겨울 한풍에 시리도록 차가웠다. 임최수는 수어전을 급히 나와 사정전으로 들어가는 샛문을 흔들었다.


"게 누군가? 시종 임최수다."


흔들리는 문 틈으로 친위대 군복을 입은 초병의 목소리가 나직이 들린다.


"엄명이오.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상감의 명이오."

"상감이라고? 누가 감히 주상전하를 상감이라 호칭하는 건가? 무엄하게!"


저쪽에서 말소리가 끊어지자 임최수는 다급해졌다.


"거기, 이정령을 불러라. 이진호를 대령하란 말이다!"


불길은 순간 거세게 타올랐다가 건춘문 밖에서 어렴풋이 동이 터오면서 한 순간에 사그라들었다. 황제가 근정전에 조회 등청을 하기 전 기침의례를 준비해야 했다. 늘 드나들던 사정전 샛문을 지키던 친위대 대장 이진호는 묘시가 되면 문을 열어 놓았다. 하지만 그날은 군졸들이 막고 서서 열어주지 않았고 그렇게 임최수는 출입을 통제당한 채 수어전과 사정전 사이 샛문에 두 명의 봉사들과 함께 지켜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동학이 난지 1년이 지나고 있었다. 임최수의 눈에 조선은 왜놈들의 판이 되어가는 듯보였다. 청군이 아산포에 진입하면서 일본군이 들어왔고, 동학군은 일본 군대 앞에 맥을 못 추고 물 밑 모래알처럼 자갈돌 사이로 가라앉아 버렸다. 대군을 끌고 온 일본은 북해함대를 전몰시키고, 육로 곳곳에 널려 있던 청군을 일소했다. 그렇게 승전한 일군은 곧장 궁으로 들어와 어전을 장악했다.

그들은 더 이상 임진년의 벌거벗은 왜적들이 아니었다. 군대의 대오를 갖추고, 기다란 화승식 조총 대신 서양식 총포로 무장하고 군기 또한 각별했다. 각개의 병사들은 좁은 소매와 가죽 걸빵을 좌우 어깨로 걸어 매고 등에는 개인 군장을 진, 누가 봐도 군더더기 없이 산뜻하고 기민한 군대로 돌아왔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조선군의 너덜한 벙거지에 창옷차림은 열등한 시대의 산물처럼 보였다.

황제는 개혁을 단행하고 입헌 군주의 길을 열었다. 왕의 직속으로 궁내부를 따로 두고 그 속에 시종원을 개설해서 승정원 업무를 편입시켰고 의정부 아래 여덟 개의 아문을 설치했다. 그중 법리 아문은 왕정에서 벗어나 법치로 가는 수순이었다. 임최수가 시종원 시종으로 발탁된 것은 선공감 감역으로 지내다가 궁내부가 생긴 바로 그 해 황제의 뜻이었다.

수어전에는 밤새 원경대감, 부원경대감을 비롯 모든 시종, 봉사, 비서관들이 빠짐없이 입직해 있었다. 간밤에 당직을 섰던 자신과 비서관들은 퇴청하지도 못한 상태로 어전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묘시 말이 되자 건춘문으로 일단의 일본 군대가 들이닥쳤다. 그들은 친위대가 섰던 자리를 교대했고, 자경전을 가로질러 곧장 북쪽으로 올라갔다. 그들의 총검이 아침햇살을 받아 하얗게 선 날이 차갑게 번득였다. 임최수가 있는 수어전의 반대편이었다.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사정전으로 들어갔고, 곧바로 황제의 수발 시종과 상궁들의 곡이 새어 나왔다. 4월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들어선 후, 일본의 내정간섭은 극에 달했고, 그것의 끝은 명성황후에게로 향했다. 고로는 이제 막 침소에서 기침하여 의관을 갖춘 황제를 알현했다.


"대원이 마마님의 사병들이 건청궁을 침략하야 분란을 일으킨 바, 황후를 발색하는 과정에 여러 나인들을 주살하고, 황후께서는 틈을 타 담을 넘어 도주하여 국모로서의 체통을 잃으시고 경거망동하신 것으로 보고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황후를 서인으로 내치고 내각을 새로 구성하는 안이었다. 고로의 의중은 완전히 황후와 황후의 외척 세력을 일소할 생각이었다. 동시에 자신들이 쥐고 흔들 행정부를 구상하고자 했다.

고로는 안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거기에는 독수리가 도안되어 있었고 그 아래에는 애국텐구라는 글자가 한자로 인쇄되어 있었다. 그는 다시 앞 주머니에서 성냥갑을 꺼내 불을 붙인 후 담뱃갑 위에 올려놓았다. 붉은색 얼굴에 긴 코를 가진 일본 도깨비가 그려진 성냥갑이었다. 담뱃갑과 성냥갑을 한꺼번에 손가락으로 잡아 앞으로 밀었다. 그리고 후 하고 길게 연기를 뿜었다. 황제를 수행한 수발 시종의 얼굴이 찌푸려지며 고로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담배를 즐기신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대일본제국은 황제께 애국 담배를 무상으로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 어디 담배뿐이겠습니까?"


검은 외교관 연미복을 입은 고로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워 든 채 쿨렁쿨렁 입에서 연기를 흘려내며 미소 지었다. 모든 것이 뜻한 바대로 순순히 잘 되어 간다는 흐름에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황제는 시종경 윤용구를 불렀다.


"밖에 시종경은 들라."


고로는 비웃듯 음험한 미소로 대꾸했다.


"지금 밖에 사람이 있을까요?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조선에 이런 말이 있다지요.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 어젯밤이 꼭 그런 밤일 것만 같습니다만! 황제께서 간 밤에도 잘 주무셨나 봅니다. 어떤 분은 하룻밤새 유명을 달리하시고..."


황제는 치를 떨며 손끝을 떨었다. 고로가 하는 말의 뜻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올 4월에 조정에 군대를 끌고 나타난 고로는 근정전 앞 뜰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광화문 앞에 대포를 진열했다. 줄지어 선 대포들의 입구는 모두 백성들을 향해 늘어서 있었다. 그때 고로는 분명 일본군 준장 계급을 단 군복을 입었었다.


"청군을 물리쳤고, 동학폭도까지 물리쳤으니, 황제께서는 이 나라를 내놓으셔야 할 때가 온 겁니다. 왕의 나라가 아니라 법의 나라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새나라가 되는 데 일본이 상감께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임최수는 친위대 이진호를 떠올렸다. 그 자의 밀고로 모든 일이 다 틀어져 버렸다. 식음을 전폐한 황제는 어전 회의도 주최할 수 없었다. 나랏일은 입직하여 들어온 내각 대신들이 처리했고, 산적한 수결도 시종 임최수가 대신 처리했다. 근정전에는 늘 공사가 파견한 고문관이 상주했다. 근정전뿐 아니라 각 아문과 심지어 궁내부까지 고문관을 파견하여 신식과 근대라는 개념으로 간섭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건청은 눈 돌리기요. 1대대는 춘생문에서 대기하시오."


임최수는 춘생문의 비극을 떠올렸다. 황후께서 참극을 맞은 그날 새벽을 어찌 잊을 텐가. 임최수의 뇌리에 비수로 박힌 그날 아침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다. 그날의 춘생문을 잊지 않을 테요, 다시 그 문을 통해 황제를 모시고 나감은 역사를 되새기고자 하는 주상 전하의 뜻일 거라 믿었다.


"임시종, 짐으로 하여금 춘생문을 넘게 해 다오."


짧은 한마디 옥음이 임최수의 귓전을 때렸다. 그날 아무 것도 하지 못했던 자신을 향한 채찍질이라 생각했다. 그 길로 임최수는 평소 눈여겨보았던 이진호를 불렀다. 군관은 배신하지 않는다, 적어도 임최수가 믿는 군관은 그런 성품이었다. 한번 주군은 변치 않는 주군이며 하늘 아래 딴 마음을 먹는 일은 없는 것이 군관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궁 밖을 나서면 내 가자는 데를 이를 테니 그리하라."


그래서 훈련대를 동원했다. 군란 때의 군관과 장병들이 궁 주변에 어울려 살았다. 벌써 10여 년이 흐른 세월이었지만 주요 가담 세력들은 복직은커녕 이력을 핑계로 본대 복귀를 금지시켰다. 그리고 남은 훈련대는 일본군 장교가 와서 군사 기초훈련과 소총 기본 기능 교육을 담당했다. 그들은 북문과 동문 밖 거류지에 몰려 살고 있었다. 생계는 해결해야겠기에 시전상인들과 어울리며 물자와 부동산을 중개하며 구전을 먹고 살았다.

그렇게 동북에 어울려 놓은 훈련대 인원만 3백이었다. 거기에다 황후의 인척, 반일세력, 실권한 권세가 집안에 달린 식솔들이 가담했다.

스물여덟 번의 인경소리가 사대문 안팎으로 울려 퍼졌다. 대문과 소문이 일제히 닫히는 소리였다. 광화문 밖의 종루에서 관상감이 지시하는 대로 종지기 셋이 달라붙어 때에 맞춰 치는 종이었다. 사대문이 잠기고 대문과 대문 사이의 소문들이 일제히 잠기면서 크고 작은 집안의 출입이 제한되는 시간이었다.

어중이 세력들이 건춘문으로 달려갔다. 문을 잡고 흔들 때, 친위대 초병과 부위가 단속할 것이다. 그들을 붙잡고 행패를 부린다. 그리고 행패는 소란이 되어 궁내 친위대 병력이 크게 동원될 것을 예상했다. 그 틈에 북쪽의 춘생문을 누군가 열어준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주상을 모시고 나갈 수 있다. 임최수는 그렇게 생각의 합을 맞추고 이진호를 대기시켜 문을 열게 만들었던 것이다.

건춘문에서 총성이 나고 소란이 일었다. 문이 깨지는 소리가 나자 연발로 총성이 이어졌고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돌을 던지던 인파들이 물러나고 고함소리만 멀리 어둠 속에서 궁 안으로 뛰어들었다. 친위대 병력들이 문밖으로 삼엄한 경계를 하며 치달아 나갔다. 깨진 문을 다시 수습해서 들어오는 사이 사위는 조용해졌다. 그날밤은 그렇게 지나갈 밤이 아니었다.

임최수는 어전에서 소식을 기다렸다. 훈련대를 지휘하는 구연수의 전갈을 기다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오지 않았다. 임최수는 황제를 안심시키고 춘생문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거기서 기다리는 것은 이진호와 구연수였다. 그들에 의해 체포된 임최수는 평리원에 압송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었다.

이미 임최수의 몸은 이도철과 함께 만신창이 되어 있었다. 이도철은 훈련대 8백을 이끈 장본인이었다. 임최수가 안에서 호응을 하고 이도철이 밖에서 일을 도모한다는 계략이었다. 그러나, 안에서 밖에서 배신자가 발생했고,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임최수는 깊은 좌절에 휩싸였다. 특히 이도철 참령에 대한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안에서의 호응에 실패했기 때문에 작전 수행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자책이 컸다. 이진호 때문이었다. 그는 말 그대로 임최수가 믿는 도끼였다.

평리원 판사들 앞에 섰을 때, 황제가 친히 법대의 상석에 행차해 좌정했다. 심문하는 내내 황제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임최수를 바라보았다. 이미 주리 틀려 꺾어진 관절은 다시 압슬에 눌려 무릎이 터져 나갔다. 이대로 살아나간다 해도 제 명에 살지 못할 것 같았다. 이미 삶을 버린 임최수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조선의 어느 신하된 자가 주군을 보위할 임무를 마다할 자가 있겠는가! 나는 하나 군관의 도리를 다 했을 뿐이다! 나라의 백성된 자가 어찌 임금을 지키고자 했는데 그것을 역모라 하겠는가!"


난언의 죄목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이 어찌 정신 나간 소리라 하는가! 임금께서 명을 내렸으면 절차를 밟아 훤한 대낮에 명을 받드는 것이 옳을 터, 어찌 인경 친 후에라야 명을 받든단 말인가! 그대들은 우리의 임금이 그렇게 참황되다고 하는 말인가!"


판관들을 꾸짖으면서도 기골찬 목청이었다.

임최수와 이도철은 이틀 후, 교형에 처해졌다. 유래 없이 빠른 사법 살인 같았다. 왜 그들이 그렇게 빠르게 형장에서 사라지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고, 그들의 사형집행을 누구도 본 사람도 없었다. 다만 시구문 밖으로 거적에 씌운 달구지 위로 설한풍 찬바람에 맨버선발 하나 비죽이 내어놓고 끄집어내가는 두 구의 시신을 문밖 노인들이 곰방대 연기 너머로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음력 11월 28일 설이 되려면 한 달하고도 서너 날이 남았을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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