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으리, 서양배가 떴습니다."
알고 있다는 듯 천대운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뱉어 냈다. 길녀에게서 아들을 볼 줄은 몰랐던 천대운이었다. 부인 강씨의 성품을 아는 천대운으로서 선뜻 출산 소식을 전할 수 없었다. 내리 딸자식만 둘을 낳고 발길을 끊다시피 외지로 돌았고, 나라가 어지러웠으므로 숨기도 하고 달려 나가기도 한 세월을 숨가쁘게 살아내고 있는 중이었다.
시종 임최수 어른만 해도 그랬다. 해산된 조선군대들을 훈련대로 재소집했을 때만해도 그들의 수발이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을미년 이후 모든 게 변했다. 훈련대가 국모를 잔학하게 살해하는 데 앞장 선 것이다. 이후 이들은 황실의 진위대로 편성되어 갔다. 그 와중에 떨어져 나간 군관들의 집단을 임최수어른이 거두었던 것이다. 그때 천대운도 외부조직의 일원을 맡았고 나라가 꺾어지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믿고 따랐던 시종어른의 뜻도 좌절되었고, 조직은 와해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일본 공사가 지휘하는 헌병대와 군 조직은 동학의 잔존세력을 소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사회 개혁 세력을 탄압했다. 사실, 그것은 일본의 조선 진출을 막는 시위에서부터 출발했다. 그 끝은 황제를 바로 세우고,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일과 닿았다.
대원이 마마의 사병 조직과 연계해야한다는 주장도 있었으나, 사직은 나아가는 것이지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시종어른의 논설이 컸다. 지금 그 부인이 사랑 안채에 와 계신 것이다. 종루 백목단에서도 집회를 하며 스치듯 지나는 길에 뵈었던 분이었다. 묵묵부언한 태도로 일관하며 시종어른을 살려 내신 분이었다. 고름을 짜내고 상처를 정결히 하면서 피묻은 무명천을 아침 저녁으로 걷어 내고 숯검정 물에 담궈 헹구고 빨고 널어 말렸다. 밝은 햇살이 따사로웠던 개나릿대가 노랗게 꽃잎을 매달 때 쪽 마루에 나와 앉아 해를 쬐던 그 모습을 아직도 기억했다. 이마에 없던 주름이 잡히고 볼살이 빠져 광대가 불거졌던 얼굴이었다. 거기에 돌보지 않아 늘어진 귀밑머리가 목줄기를 타고 흘렀다.
천대운의 가슴을 아리게 하는 그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
"무얼 그리 생각하시오?"
길녀는 장죽을 뽑아 문 천대운을 올려다 보았다. 자신의 목숨 부지가 그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두 해 전에 천대운의 아들을 낳았다. 천대운은 군산 포구 객주에 길녀를 맡겼다. 길녀는 물길을 타고 장항 서천 객주로 흘러 들어갔다. 거기서 한산으로 들어가 상무사 객주의 안채에서 몸을 풀었다. 부인 강씨의 출산을 위해 석달 전부터 친행을 보낸 터였다. 길녀의 출산도 강씨의 출산에 맞추어 진행한 일이었다.
여식을 연거푸 낳은 강씨의 입장에서 지아비를 볼 면목이 없었던지라 강씨는 천대운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었다. 그렇게 강씨가 양주에 올라가 있는 사이 몸종 길녀가 한산에서 아들을 보았던 것이다.
"나, 그 배를 타야겠소."
천대운은 놀란 기색을 하고 길녀의 눈을 내려다 보았다.
"무슨 허랑한 소린가?"
"자식도 내 손으로 키우지 못할 신세가 산들 산 것이라 하겠소?"
올 여름이 되면 시국도 잠잠해 질 것이라 생각했다. 일본이 자리를 잡고 눌러 앉게 되면 자신은 못 해도 군수하나는 떨어질 것이요, 또 그만 못해도 물길 따라 부평 너른 들판 하나 쯤은 불하받을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자고로 나랏판은 알게 모르게 양발을 이쪽과 저쪽에 담그고 있어야, 여차하면 여기 빼서 저쪽으로 뛰고, 저차하면 저기 빼서 이쪽으로 뛸 심산이었다.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그저 몸을 맡기고 있어봐야, 기달히는 건 그깟 운이었다. 운은 세상 믿을게 못된다는 걸 천대운은 장판에서 뼈속까지 익힌 사람이었다. 실력이 출중한 자와 권세에 붙은 자는 세상 무서운 게 없었다. 강단과 몸으로 범접하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는 걸 알았다.
단 하나 천대운이 뜻대로 못하는 것이 부인 강씨였다. 대꼬챙이처럼 꼿꼿한 성격에 입을 다물고 속숨을 한번 삼키면 그 누구도 당하지 못할 고약한 성질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특히 첩을 두는 행위를 용납지 못했다. 그래서 길녀를 첩으로 들이자는 말도 꺼내지를 못하던 차에 덜컥 아들부터 보았으니, 천대운으로서는 작은애기 집을 내자는 말을 틀 기회만 엿볼 뿐이었다.
"있어 보아, 신포 쪽에 집을 하나 내어 줄터이니..."
"아씨가 사람을 풀었어요."
"무슨 사람을?"
"강경 객주선에 김서방을 띄워 보냈다허요."
천대운은 아차 싶었다. 그만큼 강씨는 빠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무슨일ㄴ을 저지를지 모를 차가운 사람이었다. 때를 놓치면 그쪽 유모와 상천이까지 불려 올라올 것 같았다. 느즈막이 본 아들 상천이었다. 아들을 보지 못한 부인, 투기가 심한 아낙이었다. 소박을 맞아도 할 말이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천대운은 품성이 그런대로 순했다. 그러게 밀어붙이지는 또 못하는 그런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색을 밝히는 사내였다.
"그렇게 된다면 너 살림 날 일이 빨라질 것이니 좋은 일이 아니더냐?"
천대운은 장죽을 밀어 내고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 길녀의 속곳을 더듬었다. 속곳의 타진 틈 사이로 무성한 초목이 우거졌다. 천대운은 저도 모르게 음험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길녀가 천대운의 품을 파고들며 그의 풀어진 저고리깃을 잡아 당겼다.
"나으리, 어째 이리 급하시오?"
"이리 오너라."
천대운은 길녀의 허리를 안아 올렸다. 한 순간에 길녀가 천대운의 배위로 달려 올라갔다. 풀어진 길녀의 머리칼이 천대운의 가슴위로 풀려 떨어졌다. 그녀의 저고리 안에서 가슴이 출렁거리며 흔들렸다. 길녀의 몸이 천대운의 위에서 들쑥날쑥 움직일 때마다 대운이 가지고 온 남폿불 옆의 호롱불도 춤을 추었다.
길녀는 손가락에 침을 묻히고 팔을 뻗어 호롱불의 심지를 눌렀다.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눈이 커지고 귀가 밝아졌다. 살이 스치는 소리가 은밀하게 만들어지고, 깊어지는 두사람의 숨소리 사이로 바람에 문지방이 찌꺽거리는 소리까지 쉼없이 계속 어둠 속에 깔렸다.
"나, 배타겠소."
길녀의 음성이 느린 호흡을 타고 찔끔 찔금 터져나왔다. 거기에 천대운의 깊은 숨소리가 중간중간 끼어들었다.
"아씨 마님... 성격을, 내가... 잘 알아요."
"지둘리래두..."
어둠에 잠긴 사랑채의 긴 마루를 타고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맞은편 방에는 유씨부인이 잠들지 못하고 뜬 눈인 채로 자리에 누워 있었다. 두사람의 방사음이 지척에서 들리는 듯했다. 이집 주인 천씨와 그 내자의 몸종이 부정한 짓을 벌이고 있는 현장이었다. 천대운만 아니라면 당장 경을 치고도 남을 일이었건만, 유씨부인은 그리할 수 없었다. 자신과 천택의 생명을 의탁한 당주였다.
자신이 관여할 일이 아니었다. 남의 집안 일이었다. 그러나 이 집의 안댁도 어느 정도 돌아가는 일의 형편은 알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어차피 드러날 일이었다. 유씨부인은 잠들 수 없는 이유가 생긴 것처럼 생각에 빠졌다. 그들의 방사 소리는 밤새 이어지다가 문지방 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들기 시작하자 잦아드는 숨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가라 앉았다.
길녀방의 미닫이 문이 짧게 열렸다가 닫혔다. 마루 널판틈으로 끽끽대는 소리를 내며 천대운의 발이 유씨 부인 방 앞의 마루를 밟고 지나갔다. 자신도 모르게 문고리를 쳐다본 유씨 부인은 어느새 일어나 부처처럼 가부좌를 틀고 앉아 반쯤 내려 감은 눈으로 희끄무레한 방을 내려다 보았다. 아기의 숨소리가 어두운 하늘에서 내리는 눈처럼 차곡차곡 방안에 쌓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