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찾은 첩지

by 별사탕

"다카시란 자가 한 말인뎁쇼."


정판수와 함께 다카시가 일한다고 하는 대륙합자 회사에 다녀온 나씨가 전한 말이었다.


"아묵리가에 못 가게 생겼다고 허지라. 먼저 가 있던 왜놈들이 길길이 반대를 한다요. 나라 허가증도 못 내준다 하니, 여간 큰일이 아닌가 부요."

"그럼 이제 어쩐단 말이오?"

"별 다른 조치가 없이 저러고 제밀 앞바다에 떠 있기도 헙니다만..."


난감했다. 뱃길 하나 보고 여기까지 온 유씨부인이었다. 그 길이 없어진다니, 믿을 수없는 일이었다.


"그래, 첩지는 찾아왔소?"

"정판수가 받아는 놨습죠만, 거기에 있는 문서로는 배를 못탈깝시요."


저녁을 물린 후 늦은 밤이 되자 천대운이 길녀가 문 앞에서 유씨부인을 불렀다. 천택을 품에 안은 길녀가 유씨부인을 사랑으로 길을 잡았다.


"말씀 나누시고 오시지요, 전 윗채 아씨방에서 도련님과 놀고 있겠습니다."


사랑채에서는 천대운과 정판수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이었다. 방안에 구수한 향이 그윽했다. 처음 맡아보는 향이었다.


"이것이 서양에서 온 가배라고 하는 것이옵니다."


천대운이 좌탁 위에 놓인 쇠주전자의 물을 기울여 사기찻잔에 따라 부었다. 그리고 옆에 놓인 종지에 담긴 꿀을 한 숟가락 떠 넣어 주었다.


"가루는 가라앉게 하시고 뜨는 것은 후후 불어 멀리하시고 국물만 드시옵소."


정판수가 무릎걸음으로 앞으로 나와 천대운이 건네는 잔을 유씨부인의 소반 쪽으로 옮겨 주었다. 코끝에 형언하지 못할 고소하고 그윽한 향이 스쳤다. 유씨부인은 처음엔 입술을 적신 후 천천히 한 모금 목을 타고 넘겼다. 달고 맑은 향과 맛이 머릿속 어지러운 기운을 씻겨 내려가게 만들었다.


"황상께서 드시는 양탕국이라는 게 바로 요놈이옵니다."


정판서가 머리를 조아리며 가배에 해해 설명했다.


"물상 객주라, 배를 타고 들어오는 신묘한 물산들이 많습지요. 신고 계신 고무신도 조선에서 몇 사람 못 신는 물건입니다."


유씨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아비가 가져온 물건들이 모두 여기서 조달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잃어버린 첩지를 되찾아 왔습니다."


천대운이 좌탁 밑에서 차곡히 접힌 첩지를 꺼내 타가 위에 올려놓았다. 다시 정판수가 앞으로 나와 유씨부인의 좌탁 위로 첩지를 옮겼다. 유씨부인은 첩지를 펼쳐 내용물을 확인했다. 수민원에서 발급한 집조라는 문서와 농장허가서 등이 그대로 있었다.


"다행입니다. 이 신세를 어떻게 다 갚을지 모르겠습니다."

"웬걸요, 한데 문제가 있습니다."


천대운의 말을 받아 정판수가 말을 이었다.


"포와로 나간 사람들이 부지기수긴 하나 그 고생이 이루 말로 다 못하고, 거기서도 왜놈들의 악행에 시달려 우리 백성의 신고가 여기에 비할바가 아니라 하옵니다."


하와이 사탕수수 밭으로 노동이민을 간 사람들의 소식을 전했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홀홀단신으로 떠난 남정네들이었다. 집단 농장 생활을 하면서 목에 쇠줄을 두르고 종처럼 매를 맞으며 산다고 하였다. 장정들도 견뎌내지 못하는 가혹한 밭일을 이른 새벽부터 해야 하는 중노동이라고 했다.


"필경 마님께서 견디지 못하십니다. 못 가십니다."


천대운은 좌탁의 테두리를 잡고 힘을 주었다. 탁자 위에 놓은 찻잔과 주전자 종지들이 달그락거렸다. 유씨부인은 속으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망부의 유지입니다."


유씨부인의 한 마디에 좌중은 차갑게 식었다.


"요즘 신문에 광고가 나고 있는 곳이 또 있습니다. 아마도 그 때문에 저 배가 들어온 듯합니다만."

"예, 그렇습죠, 묵서가 노동자를 새로 모집하고 있습죠."

"묵서가?"

"포와 보다 더 가는 곳이라는데, 같은 아묵리가 땅인 듯합니다."

"그래서요?"

"급료가 높고, 타락죽을 물처럼 마신다 하며, 땔감은 물론 병원에 약도 무상 제공한다고 합니다. 매월 임금도 30원씩이나 꼬박 준다 하니 차라리 이곳이 나을 듯합니다."

"자네, 신문궤를 찾아서, 신문철을 이리로 들고 오게나."


천대운이 정판수를 시켜 신문을 들고 오게 했다. 그 사이 천대운은 사발을 들어 꿀꺽하는 소리를 내며 가배를 한 모금 마셨다.


"요 밑에 갯가에 내려가면 대불호텔이라고 양식 객주가 생겼습니다. 서양사람들이 드나들면서 이 가배라는 것을 마시지요. 그 사람들은 거기서 사람들을 만나서 사업 이야기를 긴히 할 때 항시 가배를 마신다고 합니다. 신문물은 거기에 가면 죄다 볼 수 있지요."


천대운이 대불호텔과 세창양행을 예를 들어 일본과 서양의 각축이 되고 있는 제물포의 근황을 설명했다. 청에서 일본으로, 그리고 서양 각국이 들어와 터를 잡았다. 벌판은 각종 이국의 집들로 가득 찼고, 이 응봉산만 하더라도 서양사람의 별장이 산꼭대기에 자리 잡아 멀리서도 한눈에 제물포를 내려다보는 진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조선사람의 초가들은 보잘것 없이 바닷가 한쪽에, 신비탈 구석에 초라하게 올망졸망 모여 있는 꼴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한 동안은 서양배 염탐을 좀 해야겠습니다. 배를 탈 수 있는 방법도 알아보겠습니다. 마님께서는 누추하지만 맘 편히 계셨으면 합니다. 내일 내당 식솔들과 산에도 올라가 보시고, 한길 쪽에 양식 거리도 구경하시고, 뱃가에도 가서 구경하시면 좋은 구경 거리 될 것이 많을 거외다. 배 타고 유람도 다녀 오시옵저."


유씨부인은 첩지를 두 손에 손에 쥐고 꼭 잡았다. 왠지 모를 불안이 그녀의 마음 한켠에 도사리고 있었다. 가배의 탓일까, 유씨부인은 얼핏 현기증이 나면서 머릿속에서 어질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니 괜찮습니다. 어지럼증이 잠시..."

"제가 쉬실 참에 괜히 오시라고 했습니다. 신문은 정판수 시켜서 방에서 보실 수 있게 갖다 드리겠습니다. 들어가 쉬시지요."

"아닙니다. 늦은 시간 수고로우실 것 없습니다. 내일 참에 사무관에 나가 신문을 열람하겠습니다."


유씨부인은 그 길로 일어나 방으로 건너왔다. 아묵리가로가는 길이 끊어질 것 같다는 소식은 절망과도 같았다. 그런 중에도 살기 좋은 다른 곳이 있다고 하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묵서가' 처음 듣는 나라 이름이었다. 아묵리가라는 땅이 얼마나 크면 이런 큰 나라들이 여기저기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마도 서양은 생김새도 그렇고 조선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생각 너머의 땅인 것만 같았다. 마을이 불타고, 지아비가 죽고, 문중이 하루아침에 불타 없어지는 이런 나라에서 생명을 부지한다는 사실은 기약하지 못할 먼 시간 바깥의 일이었다. 살아남는 것, 그래서 임씨의 씨를 보존하는 것이 그녀가 가문으로부터 맡아온 유일한 책무였다.


"길녀이옵니다."


문밖에 길녀가 천택을 안고 서있었다. 유씨부인은 일어나 마루로 나가 아이를 품에 안았다. 며칠 사이 아이의 몸이 무거워진 듯했다. 특별히 잘 먹이는 것도 없었다. 밥상을 겸상해서 같이 떠먹여 주는 것이 전부였는데도 키가 크려는지 제법 듬직한 무게로 안겼던 것이다.


"자네 방이 이방에 마주하는 줄 내 몰랐네."


아무리 몸종이라 하지만, 아주 낮추어 하대할 줄 모르는 유씨 부인이었다. 길녀는 움찔 몸을 웅키며 유씨 부인을 올려다보았다. 정직하고 숨김이 없는 맑은 사람으로 보였다. 객주 마당에서 지겟꾼을 대할 때 그 또렷하게 들렸던 목청을 기억했다. 그녀 앞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는 그런 맑은 정신을 길녀는 느낄 수 있었다.


"뛰는 말은 발이 있지만 하는 말은 발이 없다네. 아이 돌보느라 애썼네."


닫힌 문 창호를 보며 길녀는 섬찟 무섬증이 들었다. 자신의 행실을 다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아직 안방에서 내색이 없는 걸 보니 거기까진 말이 퍼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경 쪽으로 사람을 보냈다는 말은 길녀를 점점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천씨 소생과 함께 나타난다면, 아들을 뺏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의 운명도 그 길로 끝날 판이었다. 어려서부터 보아온 주인 강 씨의 성품을 익히 아는 터였다.

천대운의 말만 믿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길녀의 마음은 바짝 조급해졌다. 지금쯤 한산 객주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천객주의 기방을 수소문할 것이고, 아들을 돌보고 있는 한실댁을 찾아내는 것은 내일 한나절로 충분했다. 알고 덤비는 사람을 속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길녀는 방에 누워 머리를 굴렸다. 한산 쪽에 손을 쓴다는 것은 이미 때가 늦었고, 뭔가 할 일이 있다면 지금 이쪽을 손을 보는 게 맞는 일이었다. 천대운을 움직인다? 그래서 몸을 먼저 빼버리면? 사실이 밝혀지고 나서 뒷수습할 것을 없애버리는 일이 될 것이니 서로 손끝에 피를 묻힐 일이 없어 상호부조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런데 자꾸 저 부인이 걸린다. 말하는 뽄새로 보아 저 부인이 입을 빨리 놀리진 않겠지만, 만에 하나 그리 된다면 한산에서 소식이 오기 전에 자신은 강씨에게 치도곤을 당할 게 틀림없었다. 모든 관계가 다 틀어지고 자신을 거두어준 강씨 집안에 배은망덕한 일을 저지른 셈이 될 것이다.

늦은 밤, 멀리 갯가를 적시던 바닷물 소리가 으스스하게 육지 밖으로 쓸려 나가기 시작했다. 겨울이 끝나려면 아직도 두달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길녀의 머릿속이 차고 바삐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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