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시작이었을까?
조금 있으면 결혼 10년 차, 아이가 곧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기도 해서 아이들의 모습도 기록할 겸 10년 만에 가족사진을 예약해 두었다. 매년 사진을 찍지 않는 이유, 지난 액자는 다 오래되기 마련이기에 쓰레기장으로 가는 것보다 나는 딱 앨범이 좋다. 그래서 첫째의 유치원 졸업앨범도 딱 앨범만 신청해서 받았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행복도 경험해 본 만큼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머릿속 가족액자가 가장 많이 걸린 집은 할머니댁 오래된 벽마다 장성한 두 부부들의 모습이 걸려있었다.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고모, 우리 엄마와 아빠도 마치 아이들을 열심히 키워냈구나, 이 집안에는 이런 아이들이 커서 나갔구나를 보여주듯이 촌스러운 화장을 한 결혼사진들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그중 엄마와의 결혼사진은 아빠가 치웠으려나 언제까지 걸려있었던 건지 기억은 안 난다. 그러나 할머니집 거실에는 분명 어릴 적 우리 집에 있던 그 장롱과 그 서랍장이 언제부터 자리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아빠는 병원으로 엄마는 서울 이모집 근처로 올라온 후겠지.
보여주기 위한 의식들이 싫어진 건 이때부터였을까? 크게 결혼기념일도 주기도 딱히 챙기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이 신나 하는 생일케이크를 위해 케이크를 사 올 뿐, 나에게는 기념일도 나물을 꼭 먹어야 한다는 대보름같은 행사도 그리 중요치 않았다.
나에게는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중요했다.
가족액자가 그득했던 그 집은 허물어졌고, 그 가족들 중 조용한 집이 몇 안 된다. 참 운명이라는 건 가혹하게도 한 번만 아프게 하는 법이 없다. 견딜 만큼의 시련을 준다고들 하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대체 무슨 죄를 졌다고 견디고 세상을 등지게 할 만큼의 시련을 주셨을까?
어느 날 친정엄마의 이사를 돕다가 가족사진을 정리하려 했다. 우리에게 아빠는 한쪽은 슬프고 한쪽은 분노가 있기에 액자를 반가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말리는 이도 없었다. 그런데 뒤에 겹겹이 사진을 빼다 보니 아빠의 필체가 담긴 종이들이 나온다. 무슨 사건일지처럼 회사에서 동료와의 일이 커져서 싸움으로 번졌다나.. 아빠의 불안감과 안쓰러움 그리고 엄마의 고생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젠 아무도 아빠의 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수조차 없다. 망상을 겪게 되는 사람은 일상생활이 가능하다한들 기억이 뒤섞여버리기에 환청(일반 사람은 안 들리는 소리가 들림) 일지 환시(일반 사람은 안 보이는 것이 보임) 일지 도청이야기나 미행 등의 이야기가 섞이는 내용에서 진짜를 구분한다는 걸 글쎄.. 과연 정신과 의사 선생님들은 구분할 수 있을까?
젊은 시절에는 세상을 탓하기도 했고, 엄마의 잘못도 있다 생각했다. 애교는 0%, 감정표현을 잘 안 해주는 엄마가 됐다고 해버리면 그 의심이 끝도 없어질 텐데 진작에 설명을 잘해주면 안 되었을까? (애교 없는 나는 솔직하게라도 말을 꺼내거나 카톡이라도 하는데 엄마 시대에는 무리였으려나..)
어떤 의처증 남편이 이혼을 했는데 애교 있는 부인을 만나 잘 살았다는 이야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며 더욱 엄마 잘못도 확신하던 그때, 편지의 또렷한 글자체를 보면서(마치 필기체로 한글을 쓴 것처럼 기계적인 느낌이 있다) 이건 오래되었구나. 엄마는 내가 어릴 적 안 보이던 순간부터 겪었겠구나 싶었다. 그 생각이 들면서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듯 이모의 말이 떠올랐다.
동네 슈퍼집을 운영할 때 동네 아저씨가 술이라도 따라주면 난리가 났다나. 동생은 칼을 든 걸 본 적이 있다고 했다. 어느 날 엄마의 통장가방을 들고나간 아빠는 기억을 잃고 빈 손으로 돌아왔다.
내 판단에 따라 달라지고 맞춰지는 기억의 조각들
나에게도 이유가 있었다. 아빠 덕분에(?) 상담일을 선택했다. 분명 어린이집 교사를 하겠다고 들어간 대학에서 나는 굳이 상담을 선택했다. 규칙적이고 틀에 박힌 시간표 일정을 좋아하지 않기도 해서지만 그 병을 이해하고 싶었다. 아빠를 이해하고 싶었으려나. 그래, 부모를 미워하고 싶은 아이가 세상 어디 있을까? (이걸 받아들이기까지 30년이 넘게 걸렸다)
상담사에게 병은 그 사람에 대한 이해를 동반한다. 갓 태어난 아이는 죄가 없다. 누구 밑에서 어떻게 자랐느냐가 영향을 미치는 것일 텐데 내가 살아온 삶 이전으로 내려가 알아볼 수도 없는 노릇, 난 그래서 쉽게 미워할 수도 미워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상담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양면 된 인생을 살 수는 없었으니깐. (이래서 모든 치료는 가족이 하면 안 된다. 마음이 너무 담기기에 이중관계로 상담의 윤리성에 문제가 생긴다.)
나는 시간을 버티려 했고, 아버지는 자신을 도와주는 부모를 모두 돌아가시게 했기에 끈을 모두 놓쳤다. 그럼에도 나의 아이들과 함께라면 조금은 엄마의 애교만큼의 힘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마치 입원을 기다리듯 약을 빼먹다 보니 불안감이 고조되듯 여름 내내 사건에 사건을 불러일으키던 작년 겨울, 또다시 n번째 입원을 하게 되었다.
우린 몇 번이나 되풀이하며 미워해야 하고 미움받아야 할까?
나는 무슨 죄를 지었던가?
이래서 할머니는 나를 보면
미안하다 눈물을 적셨던가?
그 눈물이 싫었다.
우리 집 남매만 보면 눈물 닦던 할머니
우리만 보면 마중 나오던 할아버지
자꾸 우리가 불쌍해지는 기분
아빠 없이 자란다는 그 말
난 아이였고, 괜찮았고,
그냥 소소한 이야기를 들어줄
어른이 필요했다.
나만 보면 안쓰럽게 보는 어른 말고
그렇지만, 할머니 덕분에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가 살았고 엄마가 살았어요.
그걸 알기에 다음 몫은 제가 끝까지
책임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