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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반하별 Apr 22. 2024

친숙한 당근이 색다르게 보이는 날

나는 일을 하다가 머리가 멍해지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때면 좀비처럼 스르륵 부엌에 가서 당근을 찾는다. 씹어 먹기 알맞은 크기를 골라 흐르는 물에 대충 씻어서는 ‘아작 아작’ 씹어먹기 시작한다. 하나를 다 먹을 때쯤이면 정신도 맑아지고 기분이 좋아진다.


요즘 다이어트 음식 재료로 ‘당근’이 주목 받고 있다. 섬유질이 많아 쉽게 배부르고 변비에 효과가 있어 체중관리와 피부에 좋은 미용효과가 있다 한다. 함유되어있는 ‘베타카로틴’은 항산화 효과가 있고,  ‘루테인’, ‘리코텐’ 성분은 눈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당근 칭찬에 입이 마른다. 듣고 있으니 흔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 당근이 갑자기 새로 발견한 보물처럼 보인다. 마케팅의 힘이다.


내 눈에는 발랄하고 예쁘기만 하던데, 자신의 얼굴이나 살찐 몸매에서 개그 소재를 찾던 한 여성 코미디언이 있다. 요즘 그녀가 ‘당근 라페’, ‘당근 다이어트’  라는 트렌드를 이끌고 있다.  서울에 있는 ‘런던 베이글’에서 먹어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는데 정작 영국 사는 나는 ‘당근 라페’를 주변에서 본 기억이 없다. 대체 뭐길래.


그녀의 유튜브를 찾아본다. 그저 생식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마저도 손이 가는 레시피이지만, 비교적 만드는 방법이 간단하다. 잠깐 소금에 절였다가 물기를 짜내고 거기에 홀그레인머스타드, 올리브오일, 꿀을  넣고 조물조물 무쳐서 먹는, 새콤달콤한 ‘양식 당근 나물’ 같다. 그냥도 먹고, 와인 한잔과 함께 술안주로도 먹고, 샌드위치 속재료로도 넣어 먹는...그녀는 레시피 소개 뿐 아니라 여러가지 활용 방법까지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화면 속 그녀의 모습이 하도 밝고 활기차서 보는 사람마저 ‘한번 만들어 먹어볼까’ 싶다.


나는 요즘 음식문화에 대한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그러던 중 우크라이나 출신 셰프의 요리에세이,  '마무시카 (Mamushka, 엄마)' 를 접하게 됐다. 대대로 이어져 온 그녀의 고향음식 이야기다. 여러 가지 레시피 중 단연 내 눈을 사로잡는 메뉴가 있었으니 바로 ‘한국 당근(Korean Carrots)’이다. 현지 이름은 ‘모르코브차(Morkovcha)’. 레시피를 보니 당근을 소금에 절여 물기를 빼고 설탕, 식초, 마늘, 고춧가루를 넣어 무친 ‘매운 당근 샐러드’다. 저자는 이 음식의 배경으로 중앙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 들을 소개한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전통 김치 담글 때 쓰는 배추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고려인들이 당근을 가지고 김치를 해 먹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전통 김치에서 많이 변형됐지만, 케밥이나 쌀로 만든 음식에 곁들여 먹는 음식으로 현지 사람들이 자주 해먹는다고 한다.


연해주 조선인들의 강제 이주 이야기를 알고 있는 나는, 그 음식 소개글을 읽는 내내 가슴이 뻐근한 느낌이다.  그들이 당근의 ‘베타카로틴’,’ 리코펜’ 효과를 생각해 가며 먹었을까. 그저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고향 생각하면서 만들어 먹었고, 어려움 속에서 살아남아 이제는 현지에서 사랑받는 음식이 되었다. 꼭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처럼 말이다.


고려인 후손들이 조상의 고국에 와보고는 한국 사람들이 ‘당근김치’를 몰라서 놀란다고 한다. 유행하고 있는‘당근 라페’를 바라보면 한국을 더 친숙하게 느끼실까 싶다. 어려운 시기에 고국을 떠나 힘든 세월을 겪으신 그 후손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음식이 주는 편안한 마음 가득 안아 드시기를 바래본다.


‘김치’는 꼭 민요 ‘아리랑’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한국인의 소울을 자극하는 이 음식은 세월이 흐르고 사는 환경이 바뀌어도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의 뿌리와도 같구나 싶다. 이민 온 이후로 사 먹던 김치를 만들어 먹는 나 또한 마음 깊은 곳에서 그런 동기부여를 받았구나 깨닫는다.


음식에 스토리가 담기면 그 맛이 달라지는 법이다. 나는 오늘도 일하다가 말고 멍해지면 당근을 찾을 것이다. ‘당근레페’ 와 ‘모르코브차’를 미리 만들어 놨다가 한번 먹어봐야겠다. 예전 당근 맛과 어떻게 달라졌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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