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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이지 않아서 더 궁금한 건축물을 만나다.

세월의 피로를 잔뜩 안고 있는 옛 영국 유적 건물들.

by 세반하별

우연히 발길 닿은 낯선 공원.

녹슬고 부서진 채 세월의 피로를 잔뜩 안고 있지만 그 수려함이 빼어난 건축물을 만났다.


아무 표지판이 없어 무엇이었는지 정보를 알 수가 없다. 근처에 서 있던 아이스크림 트럭에서 근무 중인 스무 살 남짓한 판매원에게 묻는다.


"오래전 식물원이었대요. 내 기억으론 항상 저 모습이지만."

옛 식물원 건물 @세반하별
조합 공원 정문 모습 @세반하별

이하 모든 내용은 공원에 다녀온 후, 내가 대체 어디를 다녀온건지 궁금해서 이렇게 저렇게 찾아본 정보들이다. 평소에 잘 하지 않는 이런 수고를 한데에는, 오래되고 노후한데도 보수하지 않고 버티는 이유가 궁금해서 였다.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진 건물이고 공원이기에 싶어서 말이다.


이 공원의 이름은 조합 공원(Corporation Park). 정문의 위용에 비해 참 멋없는 이름이다. 영국 랭커셔주 블랙번(Blackburn, Lancashire)에 위치해 있다.

19세기 산업혁명 시대에는 근대화의 중심지로, 세계역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지역이다. 이 공원은 그 당시 면직수출로 권세를 누리던 때 지어졌다. 21세기인 오늘날, 영국에서 가장 빈곤율이 높은 지역 중 하나로 꼽히는 지역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공원에는 이 식물원뿐만 아니라 수려한 백조 호수가 있고 전쟁기념건축물이 있다. 공원 곳곳에는 당시 최고의 조형가, 예술가들이 만든 세부묘사가 화려한 분수대와 조각상들이 비치되어 있다.


그중 하나는 플로라(Flora)라고 명명된 수줍은 듯한 여신상이다. '꽃의 여신'이라는 원래 의미와는 다르게 어쩐 일인지 호러 소설가로 유명한 윌리엄 호그슨의 첫 소설 '죽음의 여신(Goddess of Death)'에 영감을 준 조각상으로 유명해졌다.

공원에 자리잡은 플로라 상 @alamy


19세기 한창 산업혁명으로 권세를 누리다가 미국 시민혁명으로 면방직 수출이 어려워지자 지역 경제가 위축되기 시작했다.


20세기 초에는 당시 여성 투표권을 쟁취하려던 인권운동가들(서프라게트, Suffragette)이 폭탄 테러를 일으킨 곳 중 하나이기도 하다. 세계 1, 2차 대전을 거치면서 공원 내에 대포를 배치하기도 했고, 독일의 공격으로 건물이나 조형물이 파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1953년 이 공원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당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부서진 축대의 재건 후원을 받는다. 현재는 시민들에게 완전히 개방되어 운동 시설, 산책 코스 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문화유산재청의 관리를 받고 있다.

영국에는 이렇게 수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 방치되어 있는 귀한 건물들이나 유적지들이 많다. 대부분 오래된 교회, 큰 규모의 성곽 같은 역사를 가진 건축물들이라 부시거나 재건할 수 없다.


건물이란 모름지기 매번 사람이 보살피고 사용해야 빛이 나는 법인데, 이 공원 시설물들의 보수 예산이 그 규모에 비해 넉넉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교회 같은 경우에는 예전보다 기독교인들이 줄어들어 건물 활용도가 떨어져 예산 낭비라는 뉴스를 접하기도 한다.

공원 앞 시민들의 모습 @사진작가 미상

바닷속 타이타닉호처럼, 지금은 형체도 망가지고 부식되어 있지만,

꼭 멋지게 반짝이지 않아도, 세월의 고단함이 그대로 묻어나도,

그렇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더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생각해본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시민들에게 개방됐다는 공원 안에 있으니, 그 당시 의복을 입고 멋진 식물원에서 여가를 즐겼을 사람들을 상상해 본다. 나도 이렇게 이 공원의 긴 시간 한켠을 함께 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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