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5년째 설 명절을 맞이하고 있다. 딸들에게 엄마 나라 문화를 알려주자 싶어 매년 떡국도 끓이고, 몇 가지 전류와 나물들을 만든다.
영국 중국 마트에서 설 장보기
한국 대기업 브랜드 떡국떡을 팔기에 넉넉히 두 봉지 준비한다. 좀 부족한가. 중국산 냉동 만두피를 사다가 집에서 손만두도 좀 빚어봐야겠다. 오래간만에 한국산 배를 팔기에 얼른 하나 장바구니에 담는다. 한국산 건 나물들을 팔기는 하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서 차마 손이 가지 않는다. 계산대 뒤에 아시안 주류들이 주욱 진열되어 있는데, 정종을 살까 하다가 제사 지낼 것도 아닌데 싶어 소주를 한 병 골라 담는다. 한 병에 만 오천 원 정도 하니 이슬 한 방울도 금방울처럼 아껴 마신다. 남은 소주로 부엌 청소하시는 분들 유튜브에서 보면 부럽다.
영국 지역별로 한글학교가 운영되고 있다. 명절맞이 줌 강의에도 참여해 본다. 산적구이를 만들어보고 청룡 그림도 같이 그려본다. 한글 선생님 말씀대로 이렇게 저렇게 잘 따라하는 딸들이 귀엽다. 먼 이국땅에서 같이 즐기고 경험해보는 문화체험은 참 소중하다.
국제 미사 만국기 입장
아, 혼자 명절 기분을 내려니 뭔가 부족하다. 구정 즈음 성당 국제 미사가 있어 참여해 본다. 각 국 국기를 들고 행진을 하는데, 딸이 대한민국 태극기를 들고 입장한다. 미사 후에는 각 나라 음식들을 모아놓고 파티를 한다. 구정 문화가 있는 나라 사람들, 중국을 비롯해서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대만 사람들도 있다. 모인 사람들과 음식 나누며 얘기하다 Happy New Year~ 인사한다.
코비드 전에는 이곳에서도 (런던, 맨체스터 같은 대도시의 차이나타운만큼은 아니지만) 새해 거리 행진 등이 성황리에 진행되었다고 한다. 코비드 기간동안 중단되었다가 작년(2023년)부터 이 행사가 다시 시작됐는데, 올해는 더 큰 규모로 한다고 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2019년까지 말레이시아에서 5년 동안 생활한 경험이 있다. 내가 살던 페낭은 중국계 인구가 전체의 70%에 이르는 말레이시아 대도시다. 신정 새해맞이가 끝남과 동시에 상점들은 온통 붉은빛으로 물든다. 액운을 쫓기 위해서는 빨강이 좋다고 믿기 때문이다. 마켓에는 문케이크라고 하는 앙꼬가 든 팥빵을 팔고, 사람들은 춘절에 나눌 선물들을 준비하느라 크리스마스 때만큼이나 쇼핑에 바쁘다. 새해 축언을 붓글씨로 쓰는 행사를 하기도 한다.
말레이시아 춘절 라이온 댄스
사자탈이나 용의 탈을 쓰고 추는 춘절 댄스팀은 사람이 모일 만한 곳이면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다. 요란한 징 소리와 함께 여러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군무를 펼친다. 귀신을 쫓기 위해 춤을 추는데, 사자의 입에 만다린 귤을 던져서 '액운은 다 걷어가세요' 한다.
이상(Yee Sang)이라 불리는 음식이 있다. 샐러드에 알록달록한 야채들, 해물류 등을 넣고 땅콩버터랑 온갖 향료들을 뿌리는데, 새해의 평안과 부귀를 기원하면서 젓가락으로 위로 들어 올리며 축언을 하는 말레이시아계 중국 문화다.
이 밖에도 붉은 등을 밝히는 홍등 축제도 열리고, 폭죽은 밤이고 낮이고 터진다. 요란할수록 불운이 물러간다 하니 시끄럽다고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는다. 한국 새해 명절은 3~5일인 반면 중국 춘제는 2주 정월대보름까지 계속된다.
춘절 당일에는 가족들이 모여 맛있는 식사와 덕담을 나누는 것은 한국 설날과 비슷한 풍경이다. 어른들은 붉은 봉투에 담은 세뱃돈을 아이들에게 주고, 일가친척들이 모여 즐거운 날들을 보낸다.
말레이시아 교민 설 명절 놀이
중국계 현지인들의 요란한 춘절 문화를 보고 있자니, 한인 교민들도 고향 가족친지들이 생각나기 마련이다.말레이시아 아이들 학교에서 만난 한인 몇몇 가족들이 모여 설 명절을 축하하기로 한다. 한복이 아이한테 작아지면 다른 아이들과 서로 돌려가며 물려 입고 빌려 입는다. 집집마다 설음식을 한 가지씩 만들어 가져오는데, 떡국, 꼬치 전, 잡채, 한과 모아보니 제법 그럴싸한 설 잔칫상이 된다. 아이들은 엄마들에게 공손하게 절을 하고 세뱃돈을 받는다. 어떻게 절을 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들은 형아 언니들이 살뜰하게 서로 가르쳐 준다. 전통 놀이로 윷놀이도 하고 제기차기도 한다. 실컷 먹고 떠들다 서로 눈빛을 나눈다. 가족과 떨어져 하는 이민생활에서는 이웃이 바로 가족이다.
그날 마침 한 가정에 한국 친정어머님이 놀러 와 계셨다. 옛날 어려서 밖이 너무 춥고 눈이 많이 오던 날, 아궁이에 불 때면서 엄마와 제사 음식 만들던 얘기를 해주신다. 지금 이곳은 35도에 육박하는 더운 날씨지만, 말씀에 귀 기울이다 보니 어느덧 흰 눈 소복이 쌓인 한국 설 명절에 가 있는 것만 같다.
우리 집이 장손가이다 보니 기 제사에 명절 제사까지 한 해 내내 수시로 있었다. 엄마는 딸 둘과 함께 장 보기를 좋아하셨다. 미리 써 온 구매 목록에 따라 가게들을 도는데, 제사상에는 크고 빛깔 좋은 음식을 조상께 올리는 거라고 하신다. 정종에 향까지 고르고 나면 엄마는 딸들에게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고르라 하셨다. 장 보는데 쫓아다니느라 애썼다는 엄마의 포상이었다.
집안에 들어선 순간부터 바빠진다. 제기를 닦고 굽고 찌고 볶고 삶고… 4구 가스레인지로 모자라 가스버너까지 내어 놓고 반나절 지지고 볶는다. 다음날 새벽같이 일어나 예쁘게 한 상 차려놓고 나면 뿌듯하기는 하다. 품이 들어 좀 피곤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조상님들이 새해 복 가득 안겨 주실 것 같은 멋진 제사상이다.
만든 음식을 가족들과 나눠먹고 부른 배를 두드리며 이제부터는 노는 시간이다. 어려서는 윷놀이도 하고 그랬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할머니 좋아하시는 고스톱이 명절 고정 레퍼토리가 되었다. 할머니는 치매 안 걸리려고 한다 하셨다. 백 원짜리 동전을 가득 챙겨 오셨던 걸 보면 자식들이랑 치는 고스톱을 정말 재밌어하셨던 것 같다. 설 다음날 조상님 모셔놓은 묘소에 다녀오면 새해 받을 복을 다 받아 온 기분이었다.
해외이주 첫 해, 설 제사 대신여행을 갔을 때 신나는 해방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고향 설이 그리워질 줄 모르고 말이다. 한국 사는 동생들이 언니는 제사 지내지 않아 좋겠다고 한다. 난 명절마다 동생들이 부럽다. 가족들끼리 복작복작 음식 나눠먹으며 덕담 나누고, 고스톱 치고, 고속도로 교통 체증에 갇혀 차 속에서 나누던 농담도 그립다. 올해도 함께 할 수는 없지만 줌으로 덕담나누는 귀한 시간 가져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