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매일 쓰는 습관을 만들어보자 꾸준하게 책상 앞에 앉는다. 글 쓰는 것이 제법 적성에도 맞고 재미있어서 근래 보기 드물게 한 분야에 깊숙하게 빠져 있다.
이제 겨우 글로 표현하기를 시작했지만, 다른 재밌는 글감이 없을까 싶다.주의환기가 필요하던 참에 마침 딸들의 중간 방학기간이 다가온다. 처음으로 둘째 딸과 단 둘만의 여행을 계획하고는 런던으로 떠난다.
영국 런던은 넓은 의미의 세계도시다. 도시 자체가 그동안의 역사의 흔적들을 그대로 담고 있고, 한 동안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만큼 각 대륙의 진귀한 보물들도 이곳에 모여 있다. 길을 걷다 보면 수만 가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로 붐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볼 수 있고, 살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런던이다. 세계 최고의 셰프 음식과 길거리 포장음식이 공존한다. 하이앤드 쇼핑거리가 있는가 하면 소호 거리에는 자그마한 책방, 액세서리 가게들이 특색 있게 반짝이고 있다. 중국화교 골목을 지나면 바로 뮤지컬 극장 거리가 나타나고, 조금 더 걷다 보면 템즈강 다리를 건너 빅벤이 보인다. 도시 자체가 하나의 박물관과 같은 곳이라 사실 며칠 머물면서 이곳을 만끽하기는 쉽지 않다. 딸과 둘이서 이렇게 저렇게 계획을 짜서는 열심히 돌아다닌다.
전통과 현대의 시간 흐름이 한 곳에 공존한다 @세반하별
나는 런던에 가면 주로 미술관 가기를 좋아한다. 시간제한 없이 흠뻑 젖어들고 싶지만, 사실 한 번도 이뤄본 적이 없다. 둘째 딸이 같은 여행스타일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 미술관보다는 쇼핑을 즐기고 싶다 한다. 내가 봤을 때는 같은 립글로스인데 그 색이 다르다고 한다. '매트'하거나 '글로시'하다고 한다. 같은 톤도 피부에 따라 발색이 다르다고도 한다. 덕분에 다른 분야의 색감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본다.
런던 리젠트 공원에서의 아침 @세반하별
나는 주로 걸으며 여행하기를 좋아한다. 천천히 그리고 우연히 즐기는 속도감이 좋고 그렇게 느낀 여행의 조각들을 더 오래 그리고 깊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걷는 여행이 힘들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전에는 하루 종일 걷다가 목마를 때 한 번씩 와인 한잔이든 차 한잔이든 하면서 쉬고는 계속 또 걷고 걸었었다. 이제는 두세 시간 걷고 나면 피로가 몰려와 숙소에서 잠시 낮잠이든 샤워를 해야 정신을 차릴 수 있다.
인산인해 사람이 많은 도시 한복판에서 유난히 더 피곤하고 지친다. 이제는 한적한 공원이나 유명거리 뒷골목을 차분하게 걷는 것이 더 좋다.
생체리듬이 조금 느려진 대신 급하지 않게 천천히 사물을 관찰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공원 벤치에 앉아 아침 조깅하는 런던 시민들, 봄을 알리는 수선화가 핀 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 순간 생각나는 사람에게 전화 걸어 문안 인사도 나눠보고, 딸과 아이스크림 하나씩 사서 베어 물고는 조용히 걷기도 한다.
만족스러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다음날 하루 종일 잠잔다. 역시 대도시는 그 자체로도 사람을 많이 지치게 한다.
컨디션이 돼 돌아오고 다시 일상 루틴에 따라 책상 앞에 앉는다. 글감도 많아지고 쓰고 싶은 글이 샘솟을 줄 알았는데, 웬일인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무엇을 써야 할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여행 전보다 글 주제도 잘 잡히지 않고 막상 쓰고 보니 구구절절 소리만 요란한 깡통 같은 글이 나온다.
“어떻게 해야 하지?”
차분하게 책상 앞에 앉아 여행동안 있었던 크고 작은 해프닝들을 최대한 상세하게 적어본다. 아침 공기 냄새부터 소호 오래된 펍 기둥 옆에서 발견한 아주 작게 쓰인 누군가의 글씨체까지 말이다.
‘ 달이 차오르듯 좋은 생각들을 담고 담다 보면, 내 그릇이 넘치며 무언가 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는 문구를 기억하고 있다. 감각이라는 것도 차분하고 꾸준하게 가꿔주어야 한다. 오늘도 좋은 생각들을 담는 시간을 갖는다. 담은 생각을 한 줄이라도 꼭 글로 써 보는 일상 수련의 마음가짐을 다 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