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호박 파스타와 마르코에 관한 이야기
나는 독일 남부에 있는 만하임이라는 곳으로 교환 학생을 가게 되었는데, 방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웠던지라 어느 성당 산하의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20명이 넘는 친구들과 거실 하나, 부엌 하나를 나눠 썼는데, 불편하기 짝이 없었지만, 또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행복했던 시절도 없는 것 같다. 오늘은 그 시절 거기서 만난 한 친구와 그가 알려준 한 레시피에 관해서 얘기해볼까 한다.
피렌체 근처 출신이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만하임 대학교에 석사 공부를 하러 왔다고 했었다. 우리는 초반부터 급속도로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기숙사 우리 층에서 모두 독일어를 쓰고 있는 가운데, 우리 둘만 딱 독일어를 한마디도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두 마디 정도 더 잘하긴 했다. Guten Tag (안녕!)하고 SIM-Karte (유심카드) ㅎㅎ… 근데 그게 뭐가 중요한가. 어쨌건 우리 둘이서 영어도 많이 하고 술도 많이 먹고, 독일 생활 초반에는 일주일 중 하루 이틀 빼고는 거의 매일 붙어 다녔던 것 같다. 친구들이 오죽하면 마르코를 나한테서 찾았겠는가.
하루는 마르코가 본가에서 올리브유 큰 통을 하나 받아왔다. 어느 나라나 기름통은 다 비슷하게 생긴 걸까. 생긴 것이 영락없이 좀 크고 프린트 없는 오뚜기 참기름 알루미늄 통이었다. 내가 올리브유로 제대로 된 이태리 요리 좀 해봐 달라고 조르니, 마르코는 할머니한테서 배운 “애호박 파스타”를 해주겠다고 했다. 그러고 슈퍼에 후딱 가서 애호박이나 하나 사 오자고 제안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재료는 다소 심플했다. 펜네 파스타, 애호박, 마늘, 버터, 올리브유, 각종 허브 그리고 치즈.
내가 마르코한테 해준 제육볶음이 몇 번인데!! 고기반찬은 아니어도 좀 더 그럴듯한 이태리 요리는 해줄 수 없었던 걸까…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건가… 이 친구 나를 너무 물로 보는 것이 아닌가… 별의별 생각이 다 들면서 퉁명스럽게 슈퍼에 따라갔다.
사실 그때는 그 올리브유가 얼마나 귀한 건지도 몰랐다. (그해 자기네 농장에서 갓 새로 착즙 한, 최상급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그 친구도 그게 귀한 거라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지…
슈퍼에서 장을 보고 와서 마르코는 30분 만에 뚝딱 요리를 해줬다. 3대째 내려오는 레시피만의 엄청난 숨겨진 비밀은 없었다. 애호박을 마늘과 올리브유에 바짝 볶아 주고 거기에 버터를 넣어 준다. 파슬리, 오레가노와 같은 각종 허브를 넣어 준 다음, 잘 삶은 펜네를 넣어서 섞어줬다. 마지막에 불을 끄고 치즈를 왕창 갈아 넣어 주면 끝!
바닥까지 긁어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스가 진짜 발군이었다. 마르코는 애호박이 고기보다 더 맛있을 때도 있는 거라고 말해줬다. 그리고 이 요리는 내 "고기가 안 들어간 요리"에 대한 엄청난 편견을 깨 주었다. 마르코는 "재료 본연의 맛에 집중한 요리"가 가장 맛있는 요리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애호박, 마늘, 펜네 파스타, 올리브유, 치즈 하나하나의 맛이 다 느껴지면서도 잘 어우러지는 것이 본인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재료에 충실한 요리가 정말 좋은 요리구나.
이날 나는 마르코의 할머니로부터 3대째 내려오는
인생의 지혜를 통째로 흡수한 기분을 느꼈다.
재료가 단순해서 쉽게 맛있는 요리를 할 수 있다는 것도 분명 한몫했지만, 친구들이나 그 당시에 만나던 친구들에게도 이렇게 채소만 들어간 요리가 맛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물론 항상 같은 레시피로 요리를 한 것은 아니다. 어떨 때는 크림도 들어가게 하고, 어떨 때는 펜네 파스타가 아닌 다른 종류로도 해보고, 어떨 때는 고기도 같이 토핑 하고... (응?) 내 마음대로 약간 베리에이션을 쳤다.
고맙게도 내 다양한 버전의 애호박 파스타는 내 인생을 거쳐 간 많은 사람들에게 꽤 좋은 반응을 얻었다. 애호박이 이런 맛을 낼지 몰랐다며. 생각보다 깊은 맛이 우러나서 신기하다며. 은근히 당기는 맛이 좋다며. 다양한 얘기를 해줬던 것으로 생각한다. 매번 맛이 일정하지는 않았지만, 애호박, 마늘, 올리브유, 버터, 허브는 항상 들어갔던 것 같다.
분명 비슷한 양의 비슷한 재료가 들어갔을 뿐인데, 매년 조금씩 더 맛이 좋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마 이 날 결심했던 것 같다. 애호박 파스타로 언젠가 꼭 글을 써야지 하고. 뭔가 똑같은 애호박 파스타였는데, 조금씩 더 맛있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올리브유는 사실 마르코가 썼던 올리브유가 짱이었을 텐데... 무슨 차이가 생긴 걸까? 몇 년 사이에 내 요리 솜씨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고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엄청 신선하고 좋은 애호박과 마늘, 밭에서 막 딴 허브, 갓 압착한 올리브유로 만든 "애호박 파스타"는 분명 아주 맛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재료가 좋아지는 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하지만 나한테 애호박 파스타는 계속 더 맛있어질 요리다. 음식 맛의 절반은 추억이라는 말이 있다. 마르코와의 추억도, 같이 먹었던 친구들과 소소한 얘기들도, 또 앞으로 또 나눠 먹을 새로운 사람들과의 생각들도 계속 새로운 재료로 추가될 것이다. 나에게는 애호박 파스타는 추억이 쌓일 수 있는 요리가 된 것 같다.
이렇게 추억이 쌓인 나의 소중한 애호박 파스타 레시피를 공유한다. 소중한 사람들과 같이 나눠 먹으면서, 이 파스타 위에 여러분들도 추억이라는 재료를 쌓아볼 수 있는 경험을 해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파스타면 4인분 (굵을수록 식감이 좋음, 필자는 스파게티를 활용했음), 애호박 1개, 마늘 8쪽, 바질, 파슬리, 로즈마리, 오레가노, 페퍼론치노 (로즈마리, 오레가노, 페퍼론치노가 없어서 적당히 이탈리아 허브 시즈닝 활용), 파마산 치즈가루, 소금, 후추, 버터, 베이비순 샐러드,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1. 애호박을 반달 썰기로 얇게 썰어주고, 마늘은 편을 썰어 준비한다.
2. 올리브유에 마늘을 먼저 볶아주고, 애호박을 같이 볶아준다. 소금과 후추 간, 이탈리아 시즈닝을 적당히 한다. 간은 '어우 짜' 할 정도가 맞다.
3. 애호박이 올리브유를 조금 흡수했다 싶으면, 더 넉넉하게 올리브유를 뿌려주고, 스파게티를 끓는 물에 소금과 올리브유를 살짝 넣고 삶아 준다.
4. 면수를 조금씩 프라이팬에 넣어 주면서 소스를 만들어주고, 버터를 아빠 숟가락 한 스푼 크게 넣어 준다. 그리고 바질과 파슬리를 적당히 투하한 후 불을 끈다.
5. 스파게티 면을 옮겨주고 소스와 잘 섞어 준다.
6. 접시에 옮겨 담고, 위에 베이비순 샐러드와 치즈 가루로 토핑 하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