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방송계에서 스타트업 세계로



“퇴사하겠습니다.”


그 단어조차 말할 필요가 없었다.

인수인계도, 사직서도 필요하지 않았다.

나만 잡고 있는 이 위태로운 끈을 놓으면 그만이었다.


나는 종영 파티의 시끌벅적함을 그늘 삼아 조용히 사무실로 향했다.

모두가 퇴근한 빈 건물, 내가 앉아 있던 책상을 정리하고 나왔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도, 나 역시 인사를 건네는 사람도 없었다.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서로의 시간을 스쳐 지나왔는지도 모른다.




방송의 세계는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군도와 같다.

작품이 시작되면 사람들이 모여들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사람들은 다시 흩어진다.

섬과 섬 사이를 오가는 정기선에 몸을 싣고 다음 정박지를 찾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 안에서의 나는 먹이를 찾아 주기적으로 이동하는 철새였고, 벼로 가득 찬 논을 오가는 메뚜기였다.

이번 섬에서 헤어져도 다음 섬에서 만날 수 있다는 안도감, 혹은 피로감이 나의 목적지를 결정했다.

대본이라는 지도와 역할이라는 나침반이 있었기에, 섬을 옮겨 다니는 일은 분주했지만 한편으론 안전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이제 더는 건너갈 섬이 없다는 것을.


내가 옮겨 다녔던 그 수많은 섬 중 어디에도 내가 정착할 목적지는 없었다.

익숙한 얼굴과 환경을 마주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선 '불편'이라는 감정이 생겨났다.

처음엔 일시적인 매너리즘이라 의심했지만, 무시할수록 그 감정은 선명해졌다.

그것이 상처였는지, 혹은 새로운 갈망이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때의 나는 진지하게 나를 살펴봐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섬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낯선 바다로 들어서기로 마음먹었다.

이 군도에 처음 도착할 때 내가 탔던 작은 돛단배에 다시 몸을 실었다.




섬을 떠나기로 마음먹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건, 떠난 뒤에 마주한 정적이었다.


방송국 담장 밖의 현실은 냉혹했다.

엔딩 크레딧에 박힌 내 이름은 군도에서만 유효한 훈장이었다.

일반적인 기업의 눈에 내 이력은 '조직 생활과는 거리가 먼 방랑의 기록'일 뿐이었다.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세상이 정해준 안전한 궤도로 숨어들려 했다.

하지만 정답이 정해진 문제를 푸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역설적으로 ‘스타트업’이라는 한 줄기 빛을 만났다.

처음엔 별거 아닌 것 같았고, 사람들이 굳이 왜 그 험지로 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름은 머릿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무모한 표류라 부르고, 누군가는 내일이 없는 항해라고 말하는 곳.

그러나 내 눈에 그곳은 정해진 각본이 없는 거대한 바다처럼 보였다.


더는 정박할 섬을 찾아 기웃거리는 철새로 살고 싶지 않았다.

남이 그려둔 지도를 따라가는 일엔 더는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비록 서툴지라도 스스로 키를 잡고 나만의 항로를 그려보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렇게 나침반도 없이 시작된 10년의 표류. 나는 그렇게 스타트업이라는 바다에서 표류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