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강남역 빌딩 숲
이 글은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입니다.
특정 기업이나 인물을 지칭하지 않으며, 일부 내용은 서사를 위해 재구성되었습니다.
면접 장소는 강남역 한복판, 고층 빌딩이 숲을 이룬 대로변의 한 오피스였다.
약속 시각보다 30분 일찍 도착했지만, 정작 내가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회사 이름을 수없이 검색해 봤지만, 결과는 보도자료를 그대로 복사해 붙인 듯한 영양가 없는 기사들뿐이었다. 비즈니스 구조나 수익 모델은커녕, 설립 일자 같은 숫자들만 머릿속에 욱여넣은 채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마주한 공간은 드라마 세트장 같았다.
하지만 감상도 잠시, 회의실로 향하는 복도에 들어선 순간 기묘한 기시감이 밀려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긴 복도에 공간의 효율성이 극대화된 구조가 보였다.
그 풍경은 대학 신입생 시절 잠시 살던 고시원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아, 고시원처럼 공간을 쪼개서 빌려주는 사업이구나."
화려한 인테리어라는 필터를 걷어내자, 비즈니스의 실체가 그제야 선명하게 보였다.
면접실 안에는 대표와 면접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단한 자기소개가 끝난 뒤, 대표는 이 사업이 단순히 임대 서비스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고객들이 자신의 비즈니스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솔루션이라고 말했다.
문득 고시원에 입주할 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학생은 공부에만 집중하면 돼요. 생활 관련한 건 우리가 다 알아서 하니까 안심하세요."
공간 서비스와 고시원. 강남의 빌딩 숲과 대학가 뒷골목.
겉모습은 달랐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후의 면접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싱거웠다.
방송 현장에서 정확히 어떤 일을 했는지 묻는 질문들이 이어지다가,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정말 내가 방송 현장에서 근무했는지 확인시켜 줄 수 있느냐는 대표의 질문이었다.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스마트폰을 꺼내 과거의 작업물을 보여줬다.
그 수많은 이름 중 내 이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인증'하는 순간, 현타가 몰려왔다.
이력서에 이미 적혀 있고, 지금까지 줄곧 설명해 온 경력을 이렇게 구차하게 증명해야 하다니.
내 말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다는 불쾌함이 생겼고, 더는 고분고분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기가 생겼다.
'당신들이 내 이력을 의심한다면, 나도 이 회사를 제대로 의심해 보겠다.'
면접이 끝날 무렵, 궁금한 것이 있느냐는 대표의 질문에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눈을 맞췄다.
채용 결과와 상관없이, 이 공간을 직접 구경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이 비즈니스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요.
기대가 사라진 자리에 당당함이 들어찼다.
내 이력을 의심하 그들에게 던진, 나만의 작은 복수였다.
하지만 그 당돌함이 작은 불씨가 되어 내 마음에 자리 잡을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 불씨는 아이러니하게도 굳게 닫혀 있던 새로운 바다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다음 날 오후, 약속이라도 한 듯 두 통의 연락이 동시에 도착했다.
공유 서비스 회사에서 보낸 합격 메일과 보수적이고 탄탄한 중견기업의 1차 합격 안내 문자였다.
사실 퇴사 후 밀려오는 불안감을 잠재우려 몇 군데 안정적인 곳에 지원서를 던져두긴 했다.
그 순간, 나는 두 갈래 길 위에 서 있는 내 모습을 상상했다.
한쪽에는 정해진 시간에 빳빳한 셔츠를 입고 정중히 고객을 맞이하는 내가 있었다.
부모님의 안도 섞인 웃음소리와 남들이 말하는 평온한 미래가 보장된 길.
하지만 그 풍경은 어쩐지 잘 짜인 세트장처럼 공허하게 느껴졌다.
이미 결말이 정해진 대본을 들고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반대편에는 강남역의 소음 속에서 복도를 헤매는 내가 있었다.
그 풍경 속의 나는 면접실에서 오기를 부리던 그 순간처럼 날이 서 있고 생생했다.
'재밌을까? 정말 괜찮을까?'
스스로 자문했다. 객관적인 조건으로 따지자면 비교조차 어려웠다.
하지만 내 마음은 이미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어 있었다.
과거 이력을 스스로 증명해야만 했던 그 순간이,
오히려 "이곳이 네가 진짜로 증명해야 할 현장"이라는 강렬한 신호로 다가왔다.
이 틈에서 내 실력을 숫자가 아닌 실체로 보여주고 싶다는 정체 모를 승부욕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결국 중견기업의 1차 합격 문자를 못 본 척하기로 했다. 마치 불합격인 것처럼.
그리고 부모님께는 그 소식을 비밀로 했다.
정답이 있는 세상을 뒤로하고 오답일지도 모르는 바다를 선택한 것에 대한 죄책감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의 기대를 서랍 깊숙이 숨긴 채, 강남역 고층 빌딩 숲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나의 첫 스타트업, 그 각본 없는 항해가 정식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