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 서비스] 스타트업을 마주하다.

02. 성장하는 회사, 밀려나는 사람

이 글은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입니다.

특정 기업이나 인물을 지칭하지 않으며, 일부 내용은 서사를 위해 재구성되었습니다.



거창한 비전이나 복잡한 사업 구조는 몰랐다. 하지만 적응은 어렵지 않았다.

당시 그 서비스는 국내에 막 뿌리를 내린 생소한 업종이었고, 성장 가능성 또한 안개 속이었다.

우리는 해외의 기업을 벤치마킹하며 달렸지만, 동시에 발밑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팀이기도 했다.


덕분에 팀의 동력은 충분했다.

퇴근 후 술자리에서도 우리의 대화 주제는 늘 회사와 업무였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팀원들은 마치 방송 현장의 스태프들 같았다.

다만, 각자의 역할이 엄격히 나뉜 현장과 달리 이곳에선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도왔다.


고객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를 찾았고,

우리는 그들의 불평과 니즈를 실시간으로 해결하며 성장의 쾌감을 맛봤다.

가끔 갈등은 있었지만 '잘해보자'는 마음 하나로 덮고 넘어갔다.


실수를 따지기보다 목표를 향해 함께 뛰는 마음이 더 컸던 시절, 회사는 빠르게 확장하며 가파르게 성장했다. 말로만 듣던 스타트업의 성장을 온몸으로 체감하던 때였다.




하지만 조직이 커지고 본부가 신설되면서, 조금씩 기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본부가 생기며 수많은 팀이 만들어졌고, 초기 멤버들이 팀장 자리를 꿰찼다.

다사다난한 과정을 함께한 동료들이 팀장이 되는 것이 부럽기도, 자랑스럽기도 했다.

나도 열심히만 하면 언젠가 저 자리에 앉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외부에서 영입된 경력직 리더들이 입사하면서 분위기는 달라졌다.


조직 운영 방식부터 성과 지표까지, 나는 이전과는 다른 기준들을 체감했다.

현장과 본부의 시선도 달라졌다.

주도적으로 운영되던 현장들은 점차 본부의 지침을 따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업무는 단조로워졌고 업무를 고민할 이유조차 사라졌다.


그 혼란 속에서 나는 서늘한 직감을 느꼈다.

현장에만 머물러서는 내 커리어를 단단하게 쌓을 수 없겠다는 위기감이었다.

무엇보다 이제 세상에 발을 디딘 비즈니스에 국한된 커리어가 된다는 것이 가장 두려웠다.

여기서 보내는 시간은 자칫 '물경력'으로 흐를 위험이 컸다.

당시 조직 문화상 경쟁사로의 이직은 쉽지 않았고, 나는 생존을 위해 본부로 가야만 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전사 인프라를 관리하는 운영팀이었다.

그곳의 경력은 시장에서도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방송 제작 경력이 있는 나에게 제안 온 직무는 '콘텐츠 제작'이었다.

선택권은 없었다. 일단 본부로 입성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하지만 그렇게 들어간 본부의 현실은 상상보다 더 냉혹했다.


조직 개편으로 리더가 변경되었고, 이동 전 논의했던 업무 일정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조직 이동 전에 협의했던 온보딩 기간은 대폭 축소되었다.

촬영 장비 하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만든 결과물이 좋을 리 없었다.

나를 질책하는 리더의 말에 하고 싶은 말은 수없이 많았지만 삼켰다.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동료들도 있었다.


한동안 그 시간을 버티며 HR 팀과 수차례 미팅을 가졌다.

내 경력과 강점을 명확하게 어필하고 증명하는 인내의 기간을 지나,

겨우 내가 원하던 운영 관리 팀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쉴 틈은 없었다.

조직이 급격히 확장되며 쏟아지는 업무를 바로 받아내야 했다.




전사 인프라를 업데이트하고 비용을 절감하는 것에 미친 듯 몰두했다.

내가 휴가를 쓰면 대체가 어려울 정도로 내 영역을 넓혔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 가치를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무엇이든 다 하는 '잡부'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고민 끝에 당시 회사의 약점이었던 '운영 시스템' 영역을 파고들었다.

당시 회사는 특정 운영 업무를 외부 협력업체에 의존하고 있었다.

나는 업체 담당자와 친분을 쌓았고, 우리 팀에 해당 업무를 내재화하는 것을 승인받았다.


관련 교육을 이수하고, 퇴근 후에도 공부하며 전문성을 쌓았다.

협력업체와 주고받은 수많은 업무 기록을 복기하며 간접 경험을 쌓았다.


이해할 수 없던 전문 용어들이 하나둘 들리기 시작했고, 내 손으로 해결하는 문제들이 늘어났다.

나만의 '무기'가 날카로워질수록 회사의 인정도 뒤따랐다.

이대로라면 괜찮겠다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하지만 현실은 다시 한번 나를 밀어냈다.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연봉 협상 테이블.

내 손에는 그동안의 결과물을 빽빽하게 기록한 A4 용지 여러 장을 들고 들어갔다.

얼마나 많은 비용을 절감했는지, 업무 효율이 어떻게 개선되었는지 숫자로 증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리더는 내가 내민 종이 뭉치를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내 준비물에 시선은 거둔 채 오히려 나에게 차갑게 되물었다.


이걸 왜 우리가 성과로 인정해야 하죠?

순간 조직 개편 과정에서 스스로 그만둔 동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리더는 내 성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표와의 면담도 소용없었다.

리더의 의견은 변하지 않았고, 대표는 중재할 수 없다는 뜻을 비쳤다.

나를 위해 힘쓸 생각이 없다고 느껴졌다.


노력의 결과가 한순간에 부정당하자 움직일 힘이 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슬펐지만, 시간이 지나자 머리가 다시 차갑게 식었다.

첫 만남, 면접장에서 내 경력을 의심받았던 그 순간이 떠올랐다.


더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회사는 믿지 않고 오직 나만 믿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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