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사의 복기] 제네럴리스트의 덫

#01_제네럴리스트의 덫

이 글은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입니다.

특정 기업이나 인물을 지칭하지 않으며, 일부 내용은 서사를 위해 재구성되었습니다.




면접장에서 과거 결과물을 보여주며 내 이름을 '인증'하던 순간을 복기해본다.

이력서에 선명히 적힌 경력을 눈앞에서 증명해야 했을 때, 나는 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이미 신호는 있었다.


이것저것 다 해본 경력은 거꾸로 '진짜로 뭘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의심을 사기 쉽다.

면접관의 눈빛에는 기대와 의심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의심을 오기로 뚫고 입사했고, 초기에는 그 '이것저것'이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고객 응대부터 공간 운영, 이벤트 기획까지.

빠르게 성장하는 조직의 멀티 플레이어가 되었다는 사실에 고양되었다.

어디서든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것, 그것이 곧 나의 가치라고 믿었다.

스타트업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제너럴리스트의 유효기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할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 업무는 끝없이 쌓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도 좀 봐줄 수 있지?"라는 요청은 당연해졌다.

거절하면 팀에 구멍이 생기는 것 같았고, 수락하면 내 시간이 조용히 사라졌다.


내 시간과 수고는 소모되었지만 회사는 그 수고로움을 성장을 위한 '기본값'으로 여겼다.

특히 비용을 아끼는 스타트업은 그런 수고를 모르는 체하기도 한다.

이런 개인의 헌신은 명확한 보상이나 계약으로 보호받기 어렵다.

호의는 어느 순간 의무가 되어 있었다.

담당 없던 업무는 어느새 내 고정 업무가 된다.


또 이것저것 다 할 줄 아는 사람은 여기저기 불려다니기 쉽다.

지금 담당자가 없어 처리할 사람이 없는 경우가 특히 그렇다.

좋게 말해서 여기저기에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회사가 규모를 갖추고 전문성과 경력이 있는 팀원들이 입사하기 시작하면 상황은 급변한다.


새 팀원이 들어올 때마다 '뭐든 다 하는 사람'으로 소개되는 건 작은 문제다.

내가 맡고 있던 업무는 적합한 경력직이 들어오면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회사는 즉시 성과를 원한다. 시간을 두고 인재를 키우는 건 여유가 있을때나 할 수 있다.

깊이 있는 경험을 쌓는 것을 기다리는 것보다 경험있는 인재를 영입하는게 비용도 적게 든다.




스타트업에는 분명한 유리천장이 존재한다.

그런데 그것이 항상 외부의 억압만은 아니다.

내가 쌓아온 경험의 깊이가 얕을 때, 그 천장은 스스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나는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결국 하나의 독보적인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회사가 가장 가려워하는 부분을 긁어줄 무기일수록 좋겠다는 생각에,

나는 흩어진 역할들 사이에서 회사가 가장 의존하는 곳, 동시에 가장 쩔쩔매는 곳을 찾기 시작했다.

우리의 역량 부족으로 직접 고객의 컨설팅을 하지 못하는 파트를 파고들었다.

문제 해결은커녕 문제 파악조차 전혀 할 수 없어 매번 발만 동동 구르던 그 부분이었다.

그 지점이 내가 들어갈 수 있는 틈이라고 판단했다.


나는 관련 교육을 이수하고 자격증을 취득하며 운영 효율화에 집중했다.

월 운영비를 10% 이상 절감했고, 여러 MOU를 통해 마케팅 소스도 만들었다.

내가 맡고 난 이후의 수치는 명확했고 전에 없던 긍정적인 리뷰도 많아졌다.

외부에서도 나를 칭찬했고, 무엇보다 팀원들의 단단한 신뢰도 얻었다.

처음으로 '이것저것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걸 하는 사람'으로 불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리더는 내가 내민 숫자와 신뢰를 단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다.

나만의 무기를 갈고닦는 것말고 무엇이 부족했을까.

처음엔 나를 의심하고 내가 만든 결과를 의심했었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회사에 직접 말하거나 물어본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나의 노력이 당연한 몫으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을, 처음부터 고민했어야 했다.


회사는 내 노력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나는 '이것저것' 하는 사람이고 회사 입장에서 내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테니까.

또한 그것을 인정할 시스템과 의지가 없는 조직이었다.

그리고 나 또한 내 노력과 수고를 당연히 알아줄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고군분투는 그저 공허한 메아리였다.




회사에서 내가 하는 모든 일, 특히 스타트업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내가 하는 일이 '회사의 역사'가 아니라 '시장의 가치'로 환산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치를 인정해줄 환경인지 빠르게 파악해야 한다.

노력과 수고를 외면하는 조직에서는, 아무리 단단한 무기도 혼자 빛날 수 없다.


회사가 성장하는 만큼 나도 성장해야 한다.

약속된 계약 이외의 수고로움은 반드시 보상받아야 한다.

당신의 헌신을 당연하게 여기는 곳에서 당신의 어떤 성과도 '기본값'일 뿐이다.

명심하자, 나는 회사에서 급여를 받고 나는 시간와 역량을 회사에 제공한다.


그리고 또 명심하자.

제너럴리스트의 덫에서 벗어나 나만의 무기를 확보하자.

그것은 시장에서도 인정받을 수 있는 전문성이어야 한다.

내가 회사에서 이것저것 다 하는 사람인지 고민해보자.


내가 계약한 업무 외에 내가 하는 것이 당연한 것들이 뭐가 있는지 확인해보자.

또 그것들의 대가로 내가 얻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해보자.


팀원의 신뢰? 호감? 좋은 이미지?

그건 나의 고유 업무로 쌓아도 충분히 쌓을 수 있다.

본래 업무로 신뢰와 호감, 좋은 이미지를 구축하지 못한다면 내 역량을 의심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호의가 권리가 되기 전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라.


그 면접장에서 느꼈던 불쾌감이 무엇이었는지, 이제는 안다.

그것은 단순한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를 증명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나 스스로도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불확실함이 이후의 모든 상황을 만들어냈다.

지금의 나는 조금 더 선명하게 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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