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순간을 기억하는건 추억이고, 시간을 기억하는건

by quitter

미련이다.


순간을 기억한다는 건 장면의 결을 떠올리는 일이다. 그때의 공기, 얼굴 표정, 손끝의 온도 같은 것들. 의미를 덧칠하지 않아도 스스로 빛나는 파편들이다. 그런 장면을 천천히 꺼내 볼 수 있다는 건 마음 한켠에 여유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웃음이 나올 수도 있고, 약간의 슬픔이 스며들 수도 있다. 둘 다 괜찮다. 감정은 지나가도 장면은 남아 부드럽게 단단하게 만든다.


반대로 시간을 기억한다는 건 달력과 시계를 더듬는 일이다. 몇 월 며칠 몇 시였는지, 그때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내가 뭐라고 답했는지. 숫자와 문장을 끝없이 되감는 버릇은 대개 결과를 바꾸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때 한마디만 덜 했더라면.” “조금만 빨랐더라면.” 이런 되짚음은 원인을 찾는 분석처럼 보이지만, 실은 돌아갈 수 없음 앞에서 맴도는 마음의 관성이다. 그래서 미련은 현재를 묶고, 과거를 신격화한다.


나는 내 기억을 이렇게 시험해 본다. 어떤 일을 떠올릴 때, 먼저 떠오르는 것이 냄새와 빛이라면 그것은 추억이고, 숫자와 말이라면 아직 미련이다. 추억은 방향을 주지만, 미련은 고리를 만든다. 방향은 나를 앞으로 이끌고, 고리는 뫼비우스의 띠 처럼 같은 자리를 돌게 한다.


결국 질문은 간단하다. 내가 붙잡고 있는 것은 장면인가, 타임스탬프인가. 앞으로의 나를 가볍게 하는 쪽을 택하겠다. 흘러간 시간은 흘려보내고, 흘러간 순간은 내 안에서 계속 살게 두겠다. 그것이 추억이고, 나머지는 시간을 붙들다 남긴 미련이다.





수,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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