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스는 '바이스'-프레지던트만이 아니다
영화 제목을 영어 제목 그대로 한글로 옮겨 쓰는 요즘 작명 방식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담 맥케이의 새 영화 <Vice>를 <바이스>로 쓰는 건 이해해줄 필요가 있다. 딕 체니의 일대기를 그린 이 영화의 제목은 겉으로는 아들 부시 대통령 시절 그의 직위인 부통령(VICE president)을 의미한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이 단어가 가진 또다른 의미, 아니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의미인 '악덕'이란 뜻을 함께 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Vice는 '악덕과 미덕 (vice and virtue)'이라는 쌍으로 자주 쓰이는데, 실은 오래 전 중세 때부터 무대 위에 등장했던 캐릭터이기도 했다. 중세 도덕극은 우정(Friendship), 아름다움(Beauty), 선행(Good deeds) 등 추상적 가치를 별도의 인물로 의인화해 우화적인 이야기를 펼쳤다. 악덕(Vice)도 그중 하나였는데,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사탄의 하인 혹은 대리인으로서 주인공이 죄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인물이었다. 이후 셰익스피어는 이 중세의 유산을 자신의 작품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그 결과가 맥베스나 이아고, 혹은 글로스터(리처드 3세)와 같은 무시무시한 악당이었다. 오늘날 수퍼 히어로 영화에 등장하는 조커나 타노스 같은 '수퍼 빌런' 역시 바이스라는 원형적 캐릭터의 후예라 할 수 있다.
(슈퍼 빌런 맥베스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https://brunch.co.kr/@starwoods/7)
이번 영화에서 바이스는 'Dick'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이름--얼간이, 혹은 남자 성기를 뜻하는 말이다--을 가지고 등장하지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역대급 수퍼 빌런이다. (딕 체니를 연기한 크리스천 베일은 이로서 수퍼 히어로와 수퍼 빌런을 모두 연기한 배우가 되었다.) 그가 일으킨 아프간-이라크 전쟁이 초래한 사상자 수가 그를 악당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며, 그런 그가 아내와 두 딸을 사랑한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였다는 사실은 그에게 전에 없던 악당 캐릭터의 지위를 부여한다.
아무튼 이 영화는 딕 체니라는 한 인물이 미국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직업이라는 비아냥을 듣기 일쑤였던 부통령 자리에서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을 저질렀는지를 (감독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실에 기반하여 관객들에게 전한다. 조금 더 가까운 과거인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그렸던 전작 <빅 쇼트>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아담 맥케이의 영화는 미국에서 벌어진 아주 특정한 사건을 다루고 있음에도 보고 있으면 남의 일 같지 않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그 특정한 사건이 '천조국'이라고도 부르는 세계 최강대국의 일이기에 우리에게도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어서이기도 하겠으나, 한편으로는 한국의 주류 엘리트들이 미국 모델을 배우고 이 땅에 고스란히 적용하려 한다는 합리적 의심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빅 쇼트>에서는 가계 대출 문제가 그러했다면, <바이스>에서는 폭스 TV의 개국이나 '지구 온난화 global warming'를 '기후 변화 climate change'라고 바꿔 불러서 프레임을 전환시키는 기술은 우리 역시 자주 접하고 당하는 일이라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그동안 한국이 산유국이 아니라는 걸 좋게 여겨본 적이 한번도 없었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 한반도에서 석유가 나지 않는 게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은 이라크와 전쟁을 시작하면서 '대량살상 무기'를 명분으로 제시했다. 그 시절 WMD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대량살상 무기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지만 네오콘은 끝끝내 이라크를 파괴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 이번 영화의 중심부에 있던 인물들은 대부분 백악관을 떠났지만 영화에서도 한번 언급되는 '볼턴'이 남아 있다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그리고 북한이 대량살상 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전 세계가 아는 기정사실이다. 대량살상 무기가 있다는 이유로 전쟁을 벌이지 않고 그걸 없애는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 그나마 고무적인 일이지만,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이 "Vice" 들이 명명한 악의 축(Axis of evil)에 북한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