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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릭 Apr 01. 2019

매혹적이고도 당혹스러운 맥베스의 속삭임

일인칭 셰익스피어 - 비극편

오랫동안 저는 <맥베스>라는 작품을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도대체 이 작품에서 뭘 배우고 느껴야 한단 말인가? 예전에 제가 참고했던 어떤 책에서는 맥베스가 불굴의 의지를 지녔기에 그가 위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납득하긴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맥베스가 한 일은 옳은 일이 아닌데, 그럼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의지를 굽히지 않는 사람을 칭송해야 한단 말인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제가 비극을 너무 편협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걸 깨달은 후부터는 이 작품이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은 제가 비극에 대한 오해를 가지도록 원인 제공을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얘기에서 출발해보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비극에 대한, 그리고 나아가 서양 연극에 있어 가장 고전적인 이론서입니다. 이 책은 그 자체로 지금도 여전히 많이 읽히고 있고, 수많은 현대 연극 이론들이 여전히 이 책에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20세기 가장 유명한 극작가라 할 수 있는 독일의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벗어난 연극을 표방하며 자신의 연극을 서사극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럴 때라도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가 출발점이 된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이 분명한 만큼 그로부터 발생하는 오해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모든 작품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평가하려는 것이지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훌륭한 비극’은 현실에서 적합한 예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당장 그리스 비극만 하더라도 현존하는 작품 중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정도를 제외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훌륭한 비극의 기준에 부합하는 경우를 찾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하는 많은 것들이 지금도 여전히 유용할 때가 있지만, 구체적인 작품, 특히나 셰익스피어나 현대 작품을 이해할 때는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유연하고 열린 자세로 작품 나름의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과 희극의 차이를 작가가 모방하는 대상의 차이에서 찾았습니다.

모방자는 행동하는 인간을 모방하는데, 행동하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인이거나 악인이다. … 희극은 실제 이하의 악인을 모방하려 하고, 비극은 실제 이상의 선인을 모방하려 한다. (<시학> 제2장)

오늘날 관점에서는 인간의 행동을 선과 악 두 가지로 나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이 너무 단정적이라 느껴지기도 합니다. 희극의 주인공이 악인이라는 것 역시 우리의 경험에 완전히 부합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비극의 주인공이 ‘실제 이상의 선인’이라는 말은 일단 어느 정도 수긍이 됩니다.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볼 때 비극은 주인공이 불행한 결말에 예상되는 이야기인데, 그 불행을 보고 우리가 ‘드디어 천벌을 받았구나!’라고 즐거워 하기 보다는 대체로 불쌍한 마음을 가지길 기대합니다. 그 말은 비극의 주인공이 범죄자나 악당이기 보다는 오히려 악당에게 고난과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기를 기대한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가 공감하고 연민할 수 있는 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받는 게 아니라 부당하게 혹은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주인공으로는 “덕과 정의에 있어서는 월등하지는 않으나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때문에 불행에 빠진 인물”이 가장 적합하다고 말한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였습니다(<시학> 제13장). 그런데 문제는 이런 설명이 <맥베스>에 잘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분명 맥베스이고 맥베스를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그가 작품 속에서 왕위를 찬탈하고 거침없이 사람을 죽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비극의 주인공이 보통 사람보다 훌륭한 선인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가 적용될 수 없는 인물인 것입니다. 하지만 맥베스를 어떻게든 아리스토텔레스의 틀에 맞춰 이해하려는 시도가 여전히 발견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우선은 맥베스가 저지른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의 특출한 성격과 의지를 높이 사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입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선과 악, 혹은 덕과 부덕의 개념은 오늘날 우리의 도덕 관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계급 사회였고 귀족적인 가치 체계가 통용되던 당시 그리스 사회는 도덕적 가치를 사회적 품격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왕과 왕자들이 미덕의 모델이 되고, 노예는 악덕의 모델이 되곤 했던 것입니다(펭귄 판 <시학>, 뒤퐁록과 랄로의 주석 참조).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맥베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신하로서의 삶과 거기에 만족하고 살 것을 종용하는 노예 도덕을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로 왕위를 쟁취해낸 고대적 영웅이자 심지어 철학자 니체가 말하는 ‘초인’에 빗대어 볼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맥베스를 옹호하는 것이 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우리의 도덕 감정에 맞지 않는 지점도 분명히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너무 많은 피를, 그것도 굳이 그럴 필요 없음에도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의 피까지 흘렸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반 인륜적 범죄자의 강인한 의지를 칭송하는 논리는 더이상 현실이나 역사에 적용될 수 없고, 이제는 허구에서도 그러한 접근에 대해 다수의 관객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는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는 점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맥베스의 행동을 맥베스 아닌 다른 인물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 역시 맥베스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틀에 맞추려는 시도와 관련 있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작품에서 벌어지는 일의 책임이 맥베스 본인이 아니라 마녀들 또는 맥베스 부인에게 있다, 혹은 그들의 영향이 지대했다고 평가합니다. 간단히 말해 마녀의 예언, 혹은 아내의 부추김과 강요만 없었더라도 맥베스는 왕을 죽이지 않았으리라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이들이 맥베스 내면에 숨어 있던 어두운 마음을 겉으로 끄집어 내고 활성화시키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덩컨 왕을 죽이는 일을 최종적으로 결정한 인물은 그 누구도 아닌 맥베스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 점을 인정하지 않으면 맥베스는 행동의 주체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도 없습니다. 맥베스의 책임을 줄이고 그 공백을 사악한 마녀, 혹은 마녀 못지 않게 사악한 맥베스 부인의 책임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은 맥베스에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비극의 주인공에 걸맞는 성격을 조금이나마 부여하려는 노력이자, 동시에 여자가 에덴 동산에서 금지된 열매를 먼저 먹은 이후 동서고금에서 지속되어 온 여성 혐오(misogyny), 즉 ‘남자의 앞길을 가로막는’ 여자라는 프레임이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맥베스 부인이 극 초반에 반역에 아주 적극적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맥베스 부인은 어디까지나 남편이 원하면서도 주저하고 있는 일을 실행하도록 돕는 역할 이상을 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행동하기 전에 오래 주저하고 고민했던 남편과 달리 부인은 행동하고 나서 후회하고 결국 양심의 가책을 못이기고 스스로 무너지는 인물로 그려집니다. 여성을 행동의 주체로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 불만족스러운 분들도 있을 수 있으나, 잘못을 저지르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는 것은 작가가 맥베스 부인을 당시 관객들—그리고 오늘날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이 정서적으로 더 공감할 수 있는 인물로 제시하고 있다는 측면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마녀와 관련해서는 더 자세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마녀의 예언을 맥베스의 행동에 결정적이든 아닌 것으로 여기든지 이들을 사악한 존재로 해석하려는 관점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저는 작가가 본문을 다른 각도로 읽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녀들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기로 하면서 여기서는 일종의 예고편으로 다음의 질문을 던져둡니다. 작가는 정말 마녀를 사악한 존재로 그리고 있는 걸까요 아니면 마녀라는 이름으로 사회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을 다루고 싶었던 걸까요?)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맥베스>는 악당이 주인공인 비극이다. 그렇습니다. 맥베스는 악당입니다. 말하자면 수퍼 히어로가 아니라 수퍼 빌런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착한 사람’의 편을 들고 ‘나쁜 X’은 적대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보고 들어 왔기 때문에 악당이 주인공인 작품을 접할 때는 조금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악당이기 때문에 심적 거리를 두고 싶은데, 주인공이기 때문에 그게 어렵습니다. 특히 맥베스가 여러 번하는 독백을 듣고 나면 더욱 더 마음이 어려워집니다. 독백이란 인물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 감정 따위를 관객이 들을 수 있도록 배우가 소리를 내어 말하는 연극적 장치입니다. 영화라면 화면에서 배우는 표정 연기를 하고 거기에 속 마음을 따로 녹음해서 ‘보이스 오버’하는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녹음 기술이 있으니 연극 무대에서도 이러한 방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기술이 없던 시절부터 소리 내어 말하되 실은 그것이 속마음이라는 것을 무대와 객석 사이의 약속으로 만들어 놓았고, 이 방식을 지금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주인공 맥베스는 극 초반에 자신의 고민을 혼자말로 털어놓는 것인데, 문제는 관객이 듣게 되는 그의 속마음이 심각한 범죄라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연극적 관행으로는 관객이 맥베스의 속마음을 전달받는 것이지만, 무대와 객석 사이에서 벌어지는 실제 상황은 마치 맥베스가 아주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는 역모를 관객에게 그냥 털어놓고, 관객은 그 말을 들음으로써 좋든 싫든 공모자가 되어 버리는 형국이 됩니다. 역모는 본래 그 일을 듣고 있기만 해도 처벌 받을 일인데, 관객은 듣기를 거부할 수도 어디에 신고할 수도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죠. 아무튼 맥베스는 우리를 공범으로 만들어 놓고 난 다음 실제 그 일을 행하고 마지막 순간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이 그저 허망한 연극 같았다는 소회에 이르기까지 자기 속마음을 친절하게 관객에게 들려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인물과 그의 행동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그의 말을 자꾸 듣다 보면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게 되고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됩니다. 특히나 독백과 같이 그의 가장 솔직한 내면을 알게 되면 그의 행동이 아무리 흉악하다 할지라도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살과 피를 가졌고 금지된 것을 욕망하는 한 인간임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 말을 듣고 있는 나 자신도 실제 그렇게 행동을 하지 않았을 뿐 어두운 마음을 품고, 또 역모까지는 아니더라도 적당히 나쁜 짓을 저질렀고 또 앞으로도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맥베스를 그저 옹호할 수만은 없습니다. 다만 맥베스가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그를 매몰차게 버리거나 그의 몰락을 보며 통쾌함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 맥베스에게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되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맥베스>는 악당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이 작품이 우리에게 만들어내는 효과는 대단히 교훈적이고 성찰적입니다. 중세 시대 유럽 전역에는 도덕극이라고 부르는 연극 형태가 있었는데, 비록 그 내용이 ‘성경 말씀 대로 착하게 살자’와 같이 노골적으로 교훈적이었지만 오랫동안 연극이 금지되었던 터라 거기서도 사람들은 연극의 재미를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일종의 ‘어두운 재미’도 추구했던 것 같습니다. 중세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내용이 바로 이른바 ‘칠죄종(seven deadly sins)’라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극의 표면적 목표는 일곱가지 죄(교만, 탐욕, 질투, 분노, 색욕, 폭식, 나태)를 경계하고 경건히 살라는 교훈을 전달하는 것이지만, 당시 관객들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죄가 무대 위에서 재현되는 것을 보는 것이야 말로 교회 설교와는 다른 재미였을 것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연극 역시 표면적으로는 지지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죄와 금기가 사람들 앞에서 재현되도록 했던 것이죠. 사람들은 착한 천사와 악한 천사의 대결할 때나, 악마의 유혹을 받는 장면 등을 구경하면서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 연극이라는 안전 장치에 기대어 사악한 상상을 은밀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맥베스가 중세극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어둠의 요소들이 발전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시대의 연극은 (물론 그때도 여러가지 제약이 있었지만) 과거보다는 훨씬 더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했기에 단순히 표면적인 교훈을 내세워 은밀한 즐거움을 제공하기 보다, 사람들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두운 욕망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합니다. 맥베스라는 선량했던 한 인물이 어느덧 악의 화신이 되어 우리에게 묻습니다. 내가 악당이라고? 너는 안 그래? 잘 생각해봐. 너는 나야. 안 그런 것 같아? 정말? <맥베스>가 교훈적이라는 것은 이 작품이 ‘착하게 살자’라는 교훈을 강요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맥베스의 독백에 귀 기울이고 있노라면 우리는 억누르고 꼭꼭 숨겨둔 자기 욕망 앞에 솔직해지기를 요구 받습니다. 그 욕망을 어떻게 배출 또는 승화할지는 어디까지나 각자의 몫이겠지요.


나는 맥베스야. 나는 왕을 죽였지. 내가 왕이 되고 싶었거든. 무턱대고 그랬던 건 아냐. 내가 왕이 될 거라고 예언해준 여자들이 있었어. 황야에서 만났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기 힘든 외모에 뭐라 말하기 힘든 신비함이 느껴졌어. 아니 어쩌면 내가 신비롭게 보고 싶었던 건지 몰라. 덩컨은 좋은 사람이었어. 그래서 무능한 왕이었지. 빈틈이 많았으니 반역이 일어날 수밖에. 그 빈틈을 내가 막아주고 있었지. 내가 없었다면 맥도널드나 코더가 덩컨을 죽이고 왕이 되었을지 몰라. 물론 덩컨을 반역자로부터 지켜준 그 손으로 결국 그를 죽였다는 게 아이러니지.


덩컨이 내 성으로 찾아온 날 밤에 그를 죽였어. 그날 밤까지도 나는 고민했지. 이 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햄릿이라면 더 고민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내겐 아내가 있었어. 그가 날 위해 모든 걸 준비해주었지. 난 그냥 신호가 울리면 덩컨이 자는 방에 들어가 그를 찌르고 나오기만 하면 되었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사실 마음을 먹기가 어려웠던 거야. 실천하기 까지 고민이 많았던 거지. 사람을 죽이는 게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그렇다고 적군을 죽이는 것과 내 주군이자 내 집에 찾아온 손님을 죽이는 걸 똑같이 생각할 수도 없었어.

 

덩컨만 죽이면 끝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특히 아내가 그렇게 생각했지, 그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어. 덩컨을 죽이고 나니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은 그냥 다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더라고. 처음엔 뱅코와 그 집 아들 플리언스가 거슬렸지. 처음 내가 황야에서 여자들에게 예언을 받을 때 뱅코도 옆에서 한 마디를 들었는데, 그 예언인즉슨 뱅코는 왕이 되지 못하지만 왕을 낳는다는 거였어.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나는 왕이 됐고 나는 자식이 없으니 이제 뱅코의 자식이 나를 죽이고 왕관을 차지할 수도 있단 말이잖아. 그럼 내가 덩컨을 죽인 건 뱅코의 후손들을 위한 봉사활동이 되는 건가.

 

그날 이후로 밤에 잠이 안 와서 그런지 한 번 든 생각이 떠나질 않았어. 그래서 결심했지. 걱정을 하기 보다 걱정 거리를 없애자고. 자객을 불러 뱅코와 그 아들을 죽이라고 시켰어. 그놈들이 일을 제대로 처리했더라면 좋았으련만. 셋이나 보냈는데 뱅코만 죽이고 아들은 놓치고 말았다는 거야. 너무 실망스러웠지만 크게 티 내지는 못했어. 연회 중이어서 보는 눈이 많았거든. 돌아와서 건배를 제안했어. 뱅코를 위한 잔치였는데 주인공이 빠져 서운하다는 말을 하고 건배를 제안했어. 그런데 저 쪽에 있어서는 안 될 얼굴이 보이는 거야. 뱅코였어. 피를 흘리면서 나를 노려 보더라고.

 

어떻게 됐겠어? 잔치가 엉망이 됐지. 아내가 수습하느라 고생이 많았어. 영주들이 내 앞에서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보였어. 그래서 드러내 놓고 잔치에 참석 조차 하지 않은 맥더프가 더 거슬렸지. 맥더프가 이미 잉글랜드로 넘어가 덩컨의 아들 맬컴과 작당을 하고 있다는 말도 들려왔어.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아내는 이제 제발 그만하라고 하는데 난 그만할 수가 없었지. 마녀들을 다시 찾아갈 때가 온 거야.  


그 여자들은 숲 속에서 온갖 이상한 재료를 넣고 뭔가를 끓이고 있었어. 그걸로 뭘 하려는 걸까? 아무튼 그들을 붙잡고 앞일을 물었지. 어떻게 또 내 마음을 읽었는지 맥더프를 조심하라고 했어.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고도 했어. 여자가 낳은 사람은 절대 나를 해치지 못할 거래. 또 버남 숲이 던시네인 골짜기로 걸어 올라오기 전까지는 내가 패할 일은 없을 거래. 듣던 중 반가운 얘기였지. 여자가 낳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으며, 나무가 무슨 수로 걸어온단 말이야? 무척 안심이 되는 말이었어. 하지만 뭐든 확실한 게 좋으니 그래도 맥더프는 죽이는 게 낫겠다 싶었어.

 

그런데 그 놈이 어떻게 알았는지 이미 잉글랜드로 도망쳤다는 보고가 들어왔어. 한 발 늦었지. 어쩌겠어. 그놈의 성으로 가서 남아 있는 아내와 아이들이라도 모조리 죽이라고 했지. 다른 영주들이 이걸 보고 배신자의 말로가 어떠한지 확실히 알게 되었을 거야. 어쩌면 그게 내 실수였던 것 같아. 나중에 알 게 된 일이지만 그 일 이후로 하나둘씩 나를 떠나 맬컴에게 가서 붙었어. 확실하게 하지 못한 게 아쉽지만 그놈들 손봐줄 틈이 없었어. 맬컴이 잉글랜드 군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정보가 있어서 전투 준비를 해야 했거든. 그놈들 얼마가 온대 봐야 다 여자에게서 난 놈들일 테니 상관없지만 상대는 해야 하니 말이야. 게다가 아내가 아팠어. 밤에 잠든 채로 궁 안을 걸어 다니면서 이상한 소리를 해댔어. 전의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고 병을 고치라고 명령했는데 그자가 말하길 이 병은 의사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래. 그까짓 의술은 개나 줘버리라고.

 

결국 아내가 죽었어. 오늘내일하고 있었지. 시작할 땐 나보다 더 대담해 보였는데 실은 감당이 안 되었나봐.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조금만 더 살아줬으면 좋았을 것을 짧은 촛불처럼 그렇게 가버렸지. 하지만 제대로 슬퍼할 겨를도 없었어. 전령 하나가 이상한 보고를 가져왔거든. 버남 숲이 다가오고 있다는 거야. 그 악마 같은 마녀들이 모호한 말로 거짓을 진실인양 꾸몄던 거지. 난 싸우기로 했어. 이제 와서 의미도 없는 인생을 더 살아보겠다고 애송이 맬컴에게 무릎을 꿇을 수는 없잖아. 게다가 누가 나를 칼로 이길 수 있겠어.  

 

한 놈씩 상대해 주었지. 모두 내 칼에 쓰러졌어. 다 여자가 낳은 자들이니 당연한 일이었지. 그때 맥더프와 마주쳤어. 그 자하고는 싸우고 싶지 않았어. 내 손으로 그 집안의 피를 더 흘리고 싶지는 않았거든. 하지만 맥더프는 생각이 다르더라고. 당연히 그렇겠지. 난 여자가 낳은 자는 나를 죽일 수 없다고 말해줬어. 그랬더니 그자가 하는 말이 인상깊었어. 자기는 어머니가 자기를 낳은 게 아니라 자기가 어머니의 자궁을 찢고 나왔대. 사실 그 말이 곧이 곧대로 믿기지는 않았어. 즉석에서 내 말을 받아친 것 같기도 했거든. 하지만 그게 거짓말이라고 무시하더라도 마녀의 말을 더 이상 붙잡을 순 없었지.


그 순간 맥이 탁 풀리더라고. 마녀를 원망하는 마음이 잠깐 들었다가 깨달았어. 그냥 내가 하고 싶었던 거야. 마녀의 말을 앞에 세워 놓고 내 마음을 가리고 싶었던 거야. 장차 왕이 되실 분. 나도 이 말을 들을만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 왜 나는 왕이 되면 안 되는데? 아버지가 왕이 아니라서 왕이 되면 안 되는 거야? 인생이라는 그림자놀이가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다면 나도 주인공이 되고 싶었어. 아무 의미가 없더라도 말이야. 잠시나마 그걸 이뤘지. 그럼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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