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정확한 시기도 잘 모르겠고 이렇다 할 계기도 없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드라마틱한 트라우마도 없다. 그저 어느 순간 문득, 내가 어딘가 아프다는 것을 알았다. 자주 모르는 척 아닌 척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올라오는 기시감이 있었다. 우울증이었다가 아니었다가 또 지금은 우울증인 건지. 얕은 우울증과 깊은 우울증을 왔다 갔다 하는 건지. 우울하다가도 괜찮은 날이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겨왔다. 괜찮다고 어물쩍 넘겼던 순간들이 쌓여서 지금 이렇게 아픈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부터 공황장애라도 있는 사람처럼 자주 숨을 헐떡이며 출근했다. 지하철을 타면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고개를 숙이면 그대로 머리가 앞으로 쏠려 넘어질 것 같았다. 지하철의 덜컹거림에 속이 울렁거렸다. 점점 손이 떨려왔다. 덜덜거리는 손으로 은색 손잡이를 부여잡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정수리 위로 다양한 시선이 느껴졌다. 호기심에 찬 무심한 시선들. 호흡이 가빴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 어딘지도 모르고 아무데서나 내렸다. 잠시 숨을 고르고 조금 괜찮아지면 다음 지하철을 탔다. 내렸다 다시 타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며 간신히 회사에 도착했다.
일은 항상 쌓여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모니터를 봤지만 글자가 흐릿했다. 같은 부분을 읽고 또 읽고. 무의식에 손을 맞긴 채 키보드를 두드렸다. 몇 시간 동안 정신없이 일을 쳐내고 나면 제대로 했는지 잘 기억 나지 않았다. 실수하지는 않았을까 불안에 떨며 끝낸 일을 두 번, 세 번 다시 확인했다.
새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업무 시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여덟 시간 근무를 한참 넘기고 야근까지 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밥도 물도 넘어가지 않았다. 아무것도 먹지 못해 위산만 가득한 속이 쓰렸다. 침대에 누워 그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물 먹은 솜처럼 팔다리가 무거웠다. 그러다 잠이 들고 아침이 오면 프로그램이 설정된 AI처럼 몸을 움직였다. 눈을 뜬 순간부터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는 순간까지 오늘 해야할 일을 계속 생각했다. 그렇게 매일 울렁거리는 위를 부여잡고 지하철에 쭈그려 앉아 한 시간짜리 출근을 했다.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있었다. 며칠에 한 번씩 수액을 맞으러 병원에 갔다. 일하는 도중에도 수액을 맞고 돌아와 야근을 이어갔다. 음식을 잘 먹지 못했고 먹는 대로 토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몸은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고 원인도 알 수가 없었다. 출석 도장을 찍 듯 토요일이면 병원에 갔다. 그런 내가 지겨웠는지 선생님은 피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피검사 결과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위가 좋지 않은 것과 별개로 두통과 심장 통증의 원인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종합 건강검진을 권유받았다. 위내시경도 하기로 했다. 수면 내시경에는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애인과 함께 갔다.
검사를 하기 전 옷을 갈아입었다. 턱까지 내려온 다크서클에 주황색이 섞인 가운까지 입으니 황달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문을 열고 나가자 내 모습을 보고 웃는 애인이 보였다. 역시 황달 같아 보였나. 기본 검사부터 시작했다. 또 피를 뽑기 위해 왼쪽 팔뚝에 바늘을 꽂아야 했다. 거적대기를 걸친 거지꼴로 피를 뽑고 있자니 뒤꼴이 당겼다. 주사 공포증이 있어 앞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린 곳에는 대장암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안내판이 있었다. '역시 대장내시경도 할 걸 그랬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늘이 살을 뚫고 들어왔다. 거즈를 댄 팔을 부여잡고 애인에게로 가 안겼다. 그는 잘 참았다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잠시 눈물을 찔끔 거린 뒤에 키와 몸무게를 재러 갔다. 키는 0.2 센티미터 줄어 있었고 몸무게는 5킬로그램이 빠져있었다. 초등학생 이후로 처음 앞자리 4를 찍었다. 슬며시 고개를 돌리니 한숨을 쉬는 애인이 보였다. 내가 살이 빠진 게 속상한 얼굴이었다. 속이 쓰릴 그를 생각하니 스스로가 조금 미워졌다. 아픈 동안 그는 나를 걱정하느라 나보다 더 아픈 사람 같아 보였다. 내가 아프면 애인도 아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속상했다.
검사 결과는 위염, 장염, 식도염, 영양부족, 탈수. 선생님은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시고는 한 달 치 약을 처방해 주셨다. 요즘 같은 시대에 영양부족이라니. 상상도 못한 병명에 헛웃음을 삼켰다. 당분간은 부지런히 약을 먹어야 했다. 이름도 모를 알약을 한 가득 담은 봉지를 들고서 집에 가는 동안 애인의 잔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밥을 잘 먹어야 해. 아니, 죽이라도 잘 먹어보자. 살이 어휴, 해골이 됐어.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가슴이 뭉클했다. 사랑이 담긴 말들에 그의 손을 더 힘주어 잡고서 집으로 돌아갔다. 2주 뒤, 우편함에 들어 있는 건강검진결과서를 발견했다. 의사 소견 칸에는 '우울증이 의심되오니 가까운 병원에서 진료를 받으십시오.'라고 적혀있었다. 머리에서 종이 울렸다. 나는 몸이 아픈 게 아니라 마음이 아픈 중이었다.
회사를 그만뒀다. 갑작스럽게 시작된 백수 생활은 낯설었지만 퇴사를 했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저 시간에 맞춰 약을 먹었고 졸리면 잠을 잤다. 그러다 깨면 넷플릭스나 웹툰을 봤다. 활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아 책 읽기는 포기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 감각이 떨어졌고, 하루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무것도 못 하는 멍청이가 된 것 같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하지만 뇌는 몸과 마음이 아픈 중이라는 것을 열심히 알려왔다. 밥은 여전히 먹지 못했고 죽도 겨우 삼켰다. 갈수록 잠을 자지 못하는 밤이 늘어 났고 결국 불면증이 찾아왔다. 그러던 중 엄마도 찾아왔다.
"삐쩍 꼴아서(이렇게 말라서) 히말가리도 없고(기운도 없고). 이걸 어쩌면 좋노(속상하다)."
먹지 못하는 탓에 살이 더 빠졌다. 두 달 만에 만난 엄마는 눈망울을 벌렁거리며 나를 아래 위로 훓었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갈 작정으로 왔는지, 계속 본가로 내려가자고 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억지에 못 이긴 척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겼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이러다 정말 아무도 모르게 멀리 떠나서 영영 사라져 버리고 싶을까 봐.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아직은 죽고 싶지 않았다. 자취를 오래 했던 터라 엄마와 사는 것이 불편할 것이 뻔했다. 그래도 혼자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짐을 싸 들고 본가로 내려갔다.
본가로 내려온 뒤에는 집에만 있었다. 최소한의 외출을 제외하고는 밖을 쳐다도 보지 않았다. 굼벵이의 신이 지상에 현신이라도 한 듯 침대에서 뒹굴거리기만 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나 유튜브만 봤다. 집중이 잘되지 않아 긴 영상을 보기가 힘들었다. 그럴 때는 종일 릴스만 몇백 개씩 봤다. 남의 집 반려동물, 남의 취미, 남의 여행기. 누군지도 모르는 남들의 일상을 보고 또 봤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보는 일에 재미도 흥미도 없었지만 고요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순간이 오면 심장이 쿵쾅거렸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감에 눈물이 났다. 눈물을 멈추기 위해 24시간 내내 영상을 틀어두었다.
배가 잘 고프지도 않았다. 뭐라도 해 먹이려는 엄마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밥을 잘 먹지 못했다. 씹고 삼키는 행위가 너무 귀찮았다. 때때로 밥과 반찬을 모조리 갈아서 주스처럼 마시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밥상 앞에서 믹서기를 손에 들고 한참을 고민했지만, 역시 그건 너무 역겨운 맛일 것 같아 시도하지 않았다.
잠을 청해도 한 시간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불을 끄고 고요해진 순간 찾아오는 생각들에 숨이 막혀왔다. 머리에 모터라도 달린 듯 이 생각 저 생각 오만 생각을 다 했다. 매일 밤 부질없는 걱정과 실체 없는 불안에 떨었다. 적막이 찾아오는 순간이 무서워 밤새 불을 끄지 못 했고, 새벽 내내 넷플릭스를 틀어뒀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나면 밖에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부릅뜬 채 보낸 새벽이 지나고 또 아침이 왔다. 바라지 않던 내일이 왔다는 사실에 질끈 눈을 감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렇게 이불 안에서 이를 악물고 버티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이건 비정상이야.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죽지는 못해서, 죽기는 싫어서, 죽을 수 없는 이유가 있어서. 그래서 병원을 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