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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연 Jan 06. 2024

5. 양극성 장애라고요?

오랜만에 기분이 들떴다. 잠도 잘 잤다. 자정이 다가오면 꼬르륵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 4시가 되면 잠에서 깼지만 피곤하진 않았다. 의도치 않게 미라클 모닝을 실천하게 되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 아침을 챙겨 먹게 되었다. 아침을 먹고 약을 먹고, 카페에 가서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점심을 먹고 약을 먹고 정처 없이 밖을 돌아다녔다. 저녁에는 친구들을 만났다. 자기 전에 약을 먹고 꼬르륵 잠에 들었다. 이렇게 반복되는 패턴이 하루 이틀 쌓여가고 있었다. 쇼핑을 가자는 친구의 말에 나는 밥도 먹고 카페도 가자고 제안했다. 오랫동안 만나지 않은 친구에게도 연락을 했다. 점심부터 해가 지고 자정이 될 때까지 밖을 돌아다녔다. 성격에 맞지 않게 일주일 내내 친구들과 어울렸다.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던 게 바로 얼마 전이었다. 병원을 다닌 지 2주 만에 엄청난 변화였다. 하지만 여전히 이유 없는 공허함에 시달렸다.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계속 허기졌다. 그러다 폭식을 했다. 평생 이 정도로 충동적이게 무언가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냥 무조건 앞에 있는 대로 입에 넣었다. 신라면도 매워서 잘 못 먹는 맵찔이인 내가 불닭볶음면을 사다 먹었다. 밤이 되면 술이 먹고 싶어졌다. 공허함이 극에 치다를 때면 10년 전 맛본 담배가 생각이 났다. 쇼핑욕이 치솟았다. 틈만 나면 쇼핑몰에 들어가 필요도 없는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쓸어 담았다. 결제 버튼을 누르기 전 간신히 휴대폰을 손에서 놓았다. 티비도 넷플릭스도 유튜브도 게임도 모두 재미가 없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12시에 잠이 들 때까지 버텨야 하는데, 모든 것에 감흥이 없으니 미칠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시간이 너무 초조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안절부절 몸을 가만히 두지를 못했다. 사람이 너무 심심하면 미칠 수도 있었다. 문득 '쏟아지는 빗속에 뛰어들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아픈 감각이라도 느끼고 싶어 아무 차 앞에나 뛰어들고 싶어졌다. 초강력 방수 코팅이 된 백지상태로 세상을 돌아다니는 기분이었다. 그 무엇도 젖어들지 않았다.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라도 들고 있는 것 마냥 모든 것들이 다 튕겨 나갔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인데 기분은 너무 우울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지내다 병원에 간 날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양극성 장애가 의심이 됩니다. 식욕과 에너지는 넘치고, 수면도 잘 되는데 많이 자지 않아도 피곤하지 않은 상태죠. 하지만 기분은 매우 우울해서 극단적인 생각을 하거나 자극적인 행동을 하고 싶어 하는데요. 양극성 장애의 혼재성 삽화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아직 증상이 애매해서 확실히 진단을 내리기는 어렵고, 종합심리검사를 하면 더 확실히 알 수도 있어요."



양극성 장애, 즉 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우울증 약을 복용할 경우 나처럼 혼재성 삽화가 나타 날 수 있다고 한다. 확실하지 않다고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이 문제였다. 나아지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이제는 확신이 없었다. 조울증은 재발이 쉬워 평생 관리가 필요하고, 평생 약을 먹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웠다. 한 발씩 내딛을 때마다 내가 밟은 땅만 아래로 꺼지는 기분이었다. 말로 형연할 수 없는 상실감이 들었다.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는 조울증 이 세 단어만 남고 모든 것이 사라진 듯했다. 이 날 내 세상은 한 번에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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