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을 세 번 옮겼다. 한 번은 취직을 하게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옮기게 되었다. 우울증에 조울증을 얹힌 채 그다음 병원을 찾았다. 첫 상담에서 그간의 히스토리를 들은 선생님은 조울증이 맞을 거 같다고 하셨다. 하지만 약은 바뀌지 않았고 그대로 우울증 치료에 집중했다. 이번 선생님은 자기 계발서 같은 분이었다. 쉽지 않겠지만 노력해라, 운동을 해라, 취미를 만들어라 등. 우울증 환자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 말들이었다. 노력한다고 몸을 움직일 수 있으면 그게 우울증인가. 결국 새로운 병원을 알아봤다.
새로 간 병원은 현재까지도 계속 다니고 있는 곳이다. 선생님은 히스토리 체크 후에 어린 시절부터 나의 가족 관계, 인간관계를 자세히 물어보셨다. 이제야 뭔가 진단이라는 걸 받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상태가 어떤 것 같냐고 물어보셨다.
"솔직히 우울증은 맞는 것 같은데, 양극성 장애는 잘 모르겠어요."
내 대답에 돌아온 것은 아주 단호한 답변이었다.
"제가 보기엔 양극성 장애가 거의 확실하고 치료 방향을 양극성 장애에 맞춰서 진행해야 할 것 같아요. 일상에서의 흥미나 재미가 떨어진다고 하셨는데, 보통은 재미없는 일상을 보내는 게 정상입니다. 그 보통의 일상을 만드는 걸 목적으로 두고 치료를 할 거예요."
세 번이나 들었으니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나는 조울증을 앓고 있다. 정식 명칭은 양극성정동장애다. 조증과 우울삽화가 있는 1 유형과 경조증과 우울삽화가 있는 2 유형이 있다. 우울증과 다른 것은 우울증에서 다시 정상상태로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정상에서 더 올라간 조증이 온다는 것에 있다. 조증이 오면 수면 시간이 줄어들고 과대 사고, 사고 질주, 목표지향적 활동을 추구한다. 신체 활동 증가하고 심한 경우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다.
언제가 시작이었을까? 원인도 알지 못한 채 결과에 허덕이는 꼴이었다. 언제부터 어디까지가 나일까? 내가 했던 수많은 선택들 중 내 병이 선택한 것들은 얼마나 될까? 내 자의가 아니었던 순간들은 얼마나 될까? 그렇게 돌아본 과거의 몇몇 일들이 그럴싸한 병증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그랬네, 하는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제는 병과 나를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병과 나만 남은 순간 그것은 나를 손쉽게 집어삼켰다. 삶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무박 삼일. 어느 드라마에서 나온 장면이다. 잠을 자지 않은 채 삼일 동안 술을 마시는 것. 그게 가능할까 하면 조증을 발휘하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스무 살이 되어 대학생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자유라는 티켓을 손에 쥐었다. 어느 정도 대학생활에 적응했을 때 병증이 찾아왔다. 솟구치는 에너지를 주최하지 못했고 그 끝은 알코올중독을 향했다. 나는 매주 주말이 찾아올 때면 친구들과 술을 마시러 다녔고 그들이 취해 테이블에 엎드려 잘 때에도 혼자서 계속 술을 퍼마셨다. 오후부터 시작된 술판은 새벽녘까지 이어졌고 아침 해가 뜰 때쯤 다들 정신을 차렸다. 그럼 24시간 식당에 가 콩나물 국밥과 소주를 시키고 해장술을 달렸다. 잡아둔 숙소에 들어가 씻고 두어 시간 잔 뒤 다시 낮부터 술을 마셨다. 주위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나는 계속 술을 마셨다. 한 달 용돈은 모두 술값으로 나갔고 소주를 댓 병씩 마셔댔다. 그러다 어느 날 새벽에는 응급실을 갔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다. 응급실의 의사는 혀를 차며 링거를 꽂아 주었다. 링거 두 대를 맞은 후에야 나는 기숙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속을 잃었다. 이미 부서진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제외하고 나는 어떤 집단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소속을 잃어버린 나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무엇도 정해진 것 없는 시간 속에서 조용히 질식하고 있었다. 방에 틀어 박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시간을 흘러 보내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싶었다. 무엇도 결정하고 싶지 않았다. 간간히 짧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집 밖을 나갈 일이 없으니 돈이 부족하진 않았다. 돈이 떨어지면 또 잠깐 아르바이트를 하면 됐다. 그렇게 1년을 보냈다. 그러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리는 팽팽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인생의 중요한 시점에 왔다는 자각이 들었다. 이제 무언가 해야 되고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뭐 못하는 게 있어? 하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것들 중에서 제일 하고 싶은 것을 고르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고른 건 유학이었다. 하지만 금전적 문제가 있으니 워킹홀리데이를 가서 그 나라에 정착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워홀을 가기 위해 영어회화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보다 언어에 재능이 있었고 3개월이 되었을 때 어느 정도 기본 회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달을 더 다닌 뒤 본격적으로 워홀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날 서울로 가고 싶다는 친구와 대화를 나눴다. 그녀는 남들 모르게 멋진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내 꿈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고 워홀을 접고 서울로 가기로 결정했다.
이 순간들의 '나'는 조증이었을지도 모른다. 의사들이 말하는 충동성, 사고 비약, 사업을 벌이는 등 뭔가를 하려는 행동, 넘치는 에너지,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감정을 그때는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내려왔던 결정들은 모두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결정할 때면 나는 이성보다는 마음이 가는 대로 그 순간의 기분을 척도로 삼아왔고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사실 그건 '내'가 내린 결정이 아니라 내 '병'이 내린 결정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 생각은 밑도 끝도 없이 부정적으로 뻗어나갔다.
내가 나였던 순간이 언제일까. 내가 나였던 순간이 있기는 할까. 내가 결정해 왔던 모든 게 틀린 건 아닐까. 지금의 나는 내가 아니라 내 병이 만든 건 아닐까. 점점 자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고 자아를 잃어버렸다. 나라고 생각했던 나의 성격이나 성향도 모두 병의 영향을 받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이 병은 유전의 영향이 크다고 하고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순간 나였으나 내가 아닌 순간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그 순간이 내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놓치거나 부러뜨리지는 않았을까 생각하니 너무 억울했다. 아닐 수도 있고 같잖은 자기 합리화일 수도 있다. 병이 내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고 도망가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닐지도 모른다는 게 나를 무섭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