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잔하고 작은 휴식들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유재석 씨의 유튜브에 전도연 씨가 나와 얘길 하다가
5년 동안 한 번도 휴가를 못 가봤다는 남창희 씨의 말에
"휴가라는 게 마음이 편하려고 가는 거잖아요, 근데 그건 꼭 휴가가 아니어도 되는 것 같아요. 어디여도 내 맘이 편하면 그것이 휴가이고 휴식인 것 같아요. 휴가에 대해 강박이 있잖아요, 누구는 어디 가는데..
어딜 가는지가 아닌 내 맘이 편한 게 중요한 거 같아요."라고 얘기해 준다.
휴가에 대한 대화를 듣고 있노라니 "휴가"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파란 하늘아래 수영복을 입고 커다란 밀짚모자를 쓴 채 선베드에 누워 음료수를 마시며 해변을 바라보는 이미지. 마치 시험문제의 정답처럼 정형화된 이미지가 나도 모르게 내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봐왔던 여행사 광고부 터였을지 할리우드 영화 속 장면들에서부터였는지도..
어쨌든 여름휴가라고 하면 어디든 멀리 떠나는 것이란 정의를 무의식 중에 내리고 있었다.
좀 더 어렸을 적엔 휴가 때 먼 곳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지만 생각해 보면 난 여행하는 걸 크게 좋아하는 성향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땐 휴가란 그래야 하니까란 생각에 주변 분위기에 휩쓸려다닌게 아닌가 싶다.
품과 시간을 많이 들여 낯선 곳과 낯선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는 곳으로 휴가를 떠나는 걸 좋아하는 사람들에 맞추어서 움직였을 뿐 정작 나에게 맞는 휴가란 어떤 걸지 스스로 깊이 생각 해보진 않았던 것 같다.
아마도 그땐 말하기 부끄러웠을지도 모르겠다. 휴가철에도 집에서 조용히 앉아 내 시간을 가지고 싶다는
바램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넌 왜 쉬는 기간에도 멀리 가지 않고 집에만 있으려고 하니?같은 질문을 받게 될까 봐.
매번 가보지 않은 곳으로 여행계획을 잡는 또래들을 보면 그 실행력에
대단하다 싶기도 하고 나에겐 왜 저런 에너지가 없는 걸까란 생각에 스스로 괜한 자책을 하기도 했다.
여행의 시작은 짐 싸기부터이며 그때부터 이미 설레기 시작한다는데 왜 난 짐을 쌀 생각만으로도
벌써 진이 빠지는 건지.. 그땐 속으로 머쓱했었지만 지금은 세상에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꽤 많다는걸 알게 됬다. 그래서 이젠 나의 에너지레벨이 그리 높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내 기준에 맞는 휴가를 생각해 본다.
멀리 가지 않아도 집에서 차로 가볍게 한 시간 거리 정도가 몸과 마음에 무리가 되지 않는 선인 듯싶다.
차로 한 시간 이내 나만의 휴가목록
-커뮤니티 전용 수영장
-운동하기 좋은 산길
-작지만 리뷰가 좋은 로컬 맛집
-강아지들이 뛰놀 수 있는 반려견 전용해변
-책냄새 가득한 대형서점과 동네헌책방
-구경할 거리가 오밀조밀 모여있는 야외 쇼핑몰
-갖가지 화려한 꽃들을 구경할 수 있는 정원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와 도넛을 먹을 수 있는 카페
등등 찾아보면 나만의 잔잔하고 작은 휴가를 즐길수 있는 장소들이 많이 있다는 것!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나에게 최고의 휴가목록중 하나는 소파에 누워 책 읽기이다.
에어컨 온도를 78도에 맞추고 달콤 쌉싸름한 마차라테 한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뒤
푹신한 쿠션들에 파묻혀 책 속으로 들어가는 시간.
책의 문장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며 끝없는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하기도 하고
우주같이 깊은 작가의 속마음을 유랑하는듯 하다.
여름엔 판타지소설이 딱이라 최근 읽었던 ‘회색인간‘.
이 책은 현대 사회의 이슈들과 환타지적인 내용이 잘 버무려져 흥미로웠던 초단편 소설모음집이다.
작가의 상상력이 법으로도 어찌 못하는 요즘 사회악들을 대신 처벌해 주는 듯한 대리만족이 느껴지기도 했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퇴근 후 한편씩 인터넷에 단편소설을 올리던 게 시작이었다는 작가의 상상력과 꾸준한 글쓰기에 연신 감탄하며 읽은 책이었다.
에세이로는 김혜원작가의 ’아무도 찾지 않는 내 이름을 찾기로 했다‘ 가 인상적이었다.
결혼을 하며 경력이 단절된 전 방송작가가 느끼는 자기 무능감과 어쩌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묘사가 너무 자세하고 또렷해서 글인데도 영상으로 보고 있는 착각을 느끼게 했다. 어찌 이리 자신의 내면을 글로써 정확하게 표현 할수 있을까?
아마도 작가의 솔직함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또렷이 느끼게 해 준 것 같다.
내면 깊이 느낀 폐배감과 무력감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 오히려 당당하고 멋있어 보여 종이책으로 한 권 소장하고 싶은 책이었다.
단정 지을 순 없지만
난 어딘가 멀리 떠나지 않아도
집안에 앉아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섬세한 내면과 일상 속을 여행할 때
더 큰 마음의 휴식을 느끼는 편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거창한 휴가계획이 아니더라도
하루를 , 또는 일주일의 시간을 잘게 쪼개 사이사이 나에게 맞는 휴식을 가지며
몸과 마음을 환기시키는 "마이크로 휴가"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