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 속의 작은 성취들과 감사함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초등학생시절 방학 때 일기 쓰기 숙제에 질려서 성인이 돼서도 일기를 왜 써야 하나 생각하던 내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일 년이 지나고 느꼈던 점들.
1.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 일기장
일기장은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토로해도 비밀을 지켜주는 친구 같다.
누구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감정이 뒤섞여있을 때 종이 위에 내 마음을 우르르 쏟아내고 나면
신기하게도 감정이 정화되는 경험을 했다. 그뒤론 일기로도 맘이 치유될 수도 있겠단 믿음이 생겨버렸다.
묵묵히 내 얘길 들어주고 어디에도 발설하지 않는 비밀 친구를 마주하듯 날것의 내 감정을 하나씩 꺼내다 보면
처음엔 휘몰아치는 파도 같던 감정들이 어느새 잔잔한 바다같이 누그러지곤 한다.
물론 친구나 가족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지만 누구에게 터놓기에 감정이 정리가 안되고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복잡한 상황이라면 사람보단 일기장을 먼저 마주하면 나중에 사람들에게 나의 감정을 얘기할 때 조금 더 정리된 생각과 감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 예로 아무리 말해도 남편이 옷을 소파에 던져놓는 바람에 혼자 폭발했을 때가 있는데 (이상하지만 이런 사소한 것에서 화가 난다) 남편에게 쏘아 붓이지 않고 일기에 나의 맘과 상황을 써내려 갔다.
한참을 @^&^#&$& 거리며 적고 나니 감정이 사그라들고 그럴 수도 있지란 맘이 들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버럭 화를 내고 다투는 일이 없도록 내 감정을 한번 일기장에 걸러내고 나니 다음날 감정이 상하지 않게 좋은 말로 얘기할 수 있었다.
2. 나에 대해 더 알게가게 만든다.
잠들기 전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있었던 일들, 들었던 감정을 정리하다 보면
내 기분이 좋았던 순간이나 화가났던 상황들을 적게 된다.
우린 스스로 좋아하고 싫어하는걸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람인지라 기록해 놓지 않으면 금세 잊어버리게 된다.
난중일기에도 작고 소소한 일상의 행복에 관한 기록이 많다고 한다.
인지심리학자 김경일 교수도 수첩을 가지고 다니며 틈틈이 자기가 좋았던 일들을 기록에 놓는다고 한다.
퇴근 후 맥주 몇 잔과 어떤 안주를 먹었을 때 딱 알맞게 기분이 좋더라라든지, ktx를 탈때 어떤 칸을 이용할 면 어떤 점에서 제일 편리하고 좋더라 같은 아주 작은 일상의 행복들 말이다.
'나의 기억력을 믿지 말고 나의 기록을 믿으라'는 말이 있듯이 일상 속 자신이 좋았던 경험을 적어 놓으면
나중에 정말 힘든 시기가 올 때 다시 나를 일으키는 방법을 기록 속에서 찾아낼 수 있다고 한다.
또 속된 말로 나의 빡침 모먼트(?)도 기록하다 보면 '아 내가 이런 부분에서 자주 화가 나는구나'를 알게 되고
내가 이리 화낼 일인지 유연한 사고를 가져야 하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또 다음에도 이 같은 상황을 마주할 때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생각해 볼 수도 있다.
3. 나의 일상을 소중히 들여다 보게 된다.
나는 주로 미니멀리즘 집투어, 평범한 일상브이로그 보는 걸 즐긴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하루를 사는지, 집은 어떻게 꾸미는지, 어떤 책을 읽는지 참 궁금하고 흥미롭다.
그러다 어떨 땐 과해져서 아무 생각 없이 스크롤을 올리며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속 모르는 이들의 삶과
몰라도 되는 세상 속 이슈에 빠져들 때도 있다.
근데 일기를 쓰다 보니 하루를 끝마치는 시간을 의식하며 맘을 고쳐 먹게 된다.
오늘 하루를 돌이키며
누워서 쓸데없는 유튜브랑 인스타그램만 했다.
내가 생각해도 한심한 하루였다..
이런 글을 쓰게 된다면 나만 보는 일기장이어도 창피할 거 같았다.
또 나 스스로의 자존감도 떨어지고 말 것이다.
나에게는 집안일, 조깅, 영어수업, 그림작업, 책 읽기같이 작지만 매일 반복하는 소중한 일상이 있다.
모르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며 부러워할 시간에 내게 주어진 소중한 일상을 놓쳐버리고 마는것이다.
일기를 쓰면서부터는 오늘 내게 있었던 일들을 좀 더 세세하게 관찰하고 되새기게 되었다.
오늘 밤 나의 하루를 기록하기 위해서 일상 속 작은 성취감이나 당연한 듯 주어졌지만 당연하지 않은 감사한 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할수 있었다.
4. 일기는 나만의 자서전이자 역사책
일기를 꾸준히 쓰는 건 하나뿐인 나에 대한 역사와 일대기를 다룬 책을 만드는 것과 같다.
언젠가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만들고 싶은 꿈이 있는 나에게 일기장은 우리집 책상 위에서 한 권씩 편찬되는 책과 같다.
물론 흑역사가 많은 관계로 나만 볼 수 있는 책이지만 ㅎㅎ
그렇게 한 권 한 권 내 책장 맨 위칸을 채워간다면 꽤 근사할 거 같다.
어떤 작가는 일기를 꾸준히 쓰는 방법에 대해 자신의 맘에 쏙 드는 일기장을 골라 보라고 한다. 장인은 장비를 탓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맘에 드는 일기장일수록 몇 자라도 더 적어보고 싶은 맘이 들었다고 한다.
또 어떤 작가는 매일 이렇게 되뇐다고 한다. '매일 쓰레기를 쓰겠어!'라고.
잘 쓰려고도 긴 일기를 쓰는 것도 아닌 정말 쓰레기 같은 글이어도 매일 쓰는 것에 목표를 두고 쓰다 보니 일기가 쓰였다고 한다.
지금 나의 일기장도 그렇다. 어느 날은 분노로 꽉 차있는 글씨체, 쓰기 싫은 기색이 역력한 힘없는 글씨체들 투성이지만 그렇게 써 내려가다가 정신을 차리기도 하고 나를 더 알아가기도 하고 또 나중에 써보고 싶은 글이 떠오르기도 한다.
나 또한 '오직 나만 볼 수 있는 창피한 일기지만 매일 써나가겠어'란 맘으로 오늘밤도 일기를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