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치는 풍경,책,기록하기,맛있는 간식들
예전에 한 번씩 검색해 보던 사진들이 있다.
오리엔트-익스프레스란 기차인데 유럽 여러 나라들을 (가령 런던-베니스, 파리-쥬리히, 파리-로마..)
가로지르며 침실, 샤워실, 바등이 다 갖춰져 있는 특급열차이다.
처음 본 기차내부의 사진에는 하얗고 깨끗한 테이블보 위에 예쁜 꽃이 꽂아져 있고 조도가 낮고 분위기 있는 노란 불빛의 램프가 올려져 있었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이 놓여있는 테이블 옆 커다란 창문으론 푸르른 나무들과 웅장한 유럽의 산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광경을 감상할수 있어 '와 이건 진짜 한 번쯤 타보고 싶은 공간이다!'란 생각이 마구 들었다.
클래식하고 아늑해 보이는 열차내 침실을 보면서 저 하얀 침대에 누워 스쳐가는 아름다운 풍경들을 눈에 담는 건 티비보는것 보다 더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음식을 비롯, 샤워실, 침실 바 등등 필요한 건 다 갖춘 기차의 내부는 마치 유럽의 역사를 담은 하나의 움직이는 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했다.
따뜻한 차와 달달한 케이크 한 조각이 놓인 자그마한 테이블에 앉아 풍경을 바라보며 책을 읽고 사진을 찍으며 지금 이 벅찬 기분을 기록해 가는 내 모습을 몇 번쯤 상상해 보았다. 덜컹거리지도 않고 미끄러지듯 달리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듯한 기차 안에서 큰 창문에 기대어 책을 읽고 글을 쓰면 어떤 느낌일까란 상상.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한 교통수단으로써 만이 아닌 그 자체로도 특별하고 행복한 기차여행이 될 수 있다니 참 근사해 보였다.
또한 영상을 보다 보면 멋지게 차려입은 외국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편안한 얼굴로 앉아있는 장면들이 눈에 띈다. 사진을 찍거나 바쁘게 무언가를 하려는 사람들 없이 기차 안에서의 그 순간을 그저 즐기는 모습에서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한동안 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오리엔탈 익스프레스의 푸르른 창문옆, 노란 램프가 켜진 자그마한 식탁의 모습이었다.
한국에 살 땐 수익에 반비례하게 괜스레 너무 바빴고 내가 좋아하는 걸 너무 모르고 살았었다.
한 번쯤은 내키는 데로 당일 바로 부산 가는 열차표를 끊고 넓은 바다를 보러 가는 즉흥적인 여행의 추억 같은 게 없다는 게 문득 아쉽게 느껴진다.
좋아하는 주스랑 과자, 빵 몇 개를 사가지고 예쁜 경치들을 감상하며 책도 보고 글도 쓰고 했었으면, 오리엔트 익스프레스까지 타지 않아도 행복의 역치가 낮은 나에겐 꽤나 행복했던 여행이 됐을 텐데. 말도 잘 통해서 다니기 편하고 회도 미국보다 훨씬 푸짐하고 싸게 맛보면서 참 신났을 텐데 하며. 한 번씩 그때 내가 해보지 못했던 로망에 대해 못내 아쉬운 맘이 들기도 한다.
버스가 두시간에 한번 올까 말까하는 캘리포니아에서 자동차는 거의 발에 신는 신발만큼이나 없어서는 안되는 제일 빠르고 편한 이동 수단이지만 한 번씩 버스나 전철에서 느꼈었던 운치가 그리울 때가 있다.
집에 돌아가는 저녁, 버스 뒷자리 쪽에 앉아 이어폰을 끼고 네온사인들을 보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길 수 있던 시간,
2호선을 타고 가다 짠하고 나타나는 반짝이는 한강 위로 노을이 지는 풍경을 지하철 문에 기대어 구경하던 일도 ..
소소하게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최근 남편과 난 버킷리스트를 하나 만들었다.
언젠가 휴가를 내서 열차여행을 하며 오래된 성이 있는 곳까지 다녀오기로.
서부에 와선 한 번도 타보지 못했던 열차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온다고 생각하면 맘이 좀 설레어진다.
다행히 강아지도 기차에 같이 탑승할 수 있고, 남편도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게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
열차에 타기 전 남편이 좋아하는 간식들을 두둑이 챙겨서 같이 나눠 먹으며
램프가 없어도 따뜻한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 자리에 앉아
읽고 싶었던 책 한 권을 펼쳐서 읽으며
글도 쓰고 붙잡아두고 싶은 그 순간의 모습을 찍을 수 있겠지.
혼행으론 떠나보지 못한 기차여행이지만 남편과 강아지와 함께 갔을때는 또 다른 묘미가 있지 않을까란 기대감이 든다. 더불어 이젠 너무 먼 곳을 그리는 것이 아닌 내가 있는 곳에서 내가 아끼는 가족과 함께 떠나는 기차여행을 마음속에 그려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