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이폴리오 '트래블'은 작가와 함께 폭넓은 스테이 경험을 소개하는 콘텐츠입니다.
글ㆍ사진 ㅣ전욱희
추운 바람이 물러나고, 따스한 바람이 콧등을 간지럽힌다. 곳곳에는 꽃이 피고, 연둣빛 잎들이 고개를 든다. 이런 계절이 찾아오면 웅크렸던 몸을 활짝 펴고, 봄바람을 맞이하러 나가야 한다. 올해 찾아온 봄을 마주하러 우리는 청도로 여행을 떠났다.
일상 속 마주하는 많은 재료가 인공적인 것으로 바뀌어 버린 시대. 그래서 나무와 풀, 새소리가 있는 자연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나의 취향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 머무를 곳은 나무로 된 집, 먹집 운집에 눈이 갔다. 다양한 나무의 질감, 무늬, 색감이 느껴지는 곳. 얼른 그 공간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경험해 보고 싶었다.
청도는 수서에서 SRT를 타고 동대구역에 도착해 새마을호로 환승하여 3시간 이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과 열차가 있던 회색빛 플랫폼을 떠나 고즈넉한 청도역에 내리니 우리의 여행이 시작된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점심으로 청도 음식인 웅치기를 먹고, 이 완연한 봄기운을 만끽하러 레일바이크를 타러 갔다. 단체로 놀러 온 학생들, 코스가 이렇게 길 줄 모르고 탔던 아주머니들과 함께 청도천을 따라 열심히 발을 굴렸다. 얼굴을 간지럽히는 선선한 바람을 따라 흩날리는 벚꽃잎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먹집 운집에 도착하니, 호스트님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좋은 기회로 설명을 들으며 운집도 둘러볼 수 있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는 먹집과 운집은 각각 아들과 아버지의 취향을 담았다고 한다. 오늘 우리가 머물 아들의 집, 먹집은 연인 또는 친구와 머무를 수 있는 산뜻한 공간, 아버지의 집, 운집은 여러 사람이 머물 수 있는 너그러운 공간이었다. 모습은 다르지만, 나무로 지은 집이라는 같은 피가 흐른다. 두 집 모두 실내에서 짙은 나무 향이 느껴졌다.
먹집의 문을 여니, 그림처럼 펼쳐진 거실이 있다. 까만 탄화목으로 마감되어 있던 외부와는 달리 내부는 부드러운 나무 색이 가득 담긴 공간이다. 오후 4시쯤의 부드러운 햇살이 거실에 드리워져 책상 위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무엇이 놓일지 알았다는 듯, 물건에 맞게 짜인 책상. 불투명한 유리 아래로 보이는 안내서와 문구류, 스탠드 위에 놓인 편지들을 살펴보면서 마음이 참 몽글몽글해졌다. 이 마음을 남기고 싶어 연필을 들고 방명록에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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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어느 정도 둘러보고 나서, 따스한 물에서 수영을 했다. 야외에서 수영을 하기 이른가 싶었는데, 몸은 따뜻하고 얼굴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기분이 좋았다. 까만 탄화목으로 둘러싸인 야외 공간에서, 햇빛을 받고 푸르게 빛나는 맑은 수영장 물과 저 멀리 보이는 청도의 풍경을 보고 있으니 시간이 금세 흘러갔다.
수영을 잔뜩 하고 나니 허기가 졌다. 해는 어느덧 산 뒤로 넘어가고, 붉고 여린 빛이 마을을 비추고 있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미나리로 유명한 한재천을 따라 즐비한 가게 중 한 곳을 찾았다. 고기가 구워지기 전, 파릇한 미나리를 생으로 먹어보니 코끝으로 초록빛 봄 향기가 올라온다. 지글지글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삼겹살에 함께 구워 먹으니 색다른 풍미가 느껴져, 둘이 평소에 먹던 양보다 훨씬 많이 먹었다.
먹집으로 다시 돌아와 생일을 맞이한 나를 위해 케이크에 초를 불었다. 와인도 함께 곁들이며 오늘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했다. 둥근 테이블을 중심으로 조명 하나 걸린, 그 아늑함이 우리의 시간을 쓰다듬는다. 밖이 점점 더 검게 짙어져 우리가 있는 이 공간만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밝혀진 것 같았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2층으로 올라가 포근한 침대에 누워 스르르 잠이 들었다.
부드러운 햇살 속에서 눈을 뜬 아침. 남편은 아직 꿈나라에 있다. 2층의 테라스에 나가보니 내려다보이는 청도의 풍경이 눈부시다. 어제 낮에는 청도를 누비며 놀고, 오늘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기도 하니 청도를 좀 더 알게 된 기분이었다. 산 아래 펼쳐진 넓은 밭, 그 옆의 저수지. 초록빛 녹음을 따라 여유가 느껴지는 곳. 맑게 트인 기분에 천창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맞으며 헤드폰으로 CD 음악을 듣고, 책을 한참 읽으며 여유를 음미했다. 책을 다 읽어갈 즈음 부스스 남편이 일어났다.
남편과 함께 1층에 내려가 행거 옆에 마련된 찬장에서 커피를 내렸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남편은 책상에 앉아 우리의 여행을 기록했고, 나는 부드러운 소파에 앉아 먹집에 있던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밖에서 드리우는 햇빛이 수영장에 반사되어 반짝이고, 자연을 닮은 음악이 흐르는 거실에서 따로 또 같이 차분한 아침을 보냈다.
먹집은 자꾸 이곳저곳을 둘러보게 했던, 공간에 녹아 있는 기분 좋은 디테일이 있었다. 옷을 편히 걸 수 있는 행거, 목재로 된 세면대, 부드러운 소재의 커튼이 문에 따라 열리도록 한 디테일. 샤워를 하다 언뜻 고개를 들었을 때, 샤워실에 난 창으로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물방울이 반짝였다. 세면대 옆에는 양치 컵을 둘 수 있는 작은 홈이 있고, 싱크대와 전자레인지 장은 맞춤옷을 입은 듯 짜여 있다. 어찌 이 공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을까.
이곳에서의 하루는 나를 꿈꾸게 했다. 나의 삶에 어떤 걸 들일까, 생활 방식에 맞는 공간은 어떤 모습일까, 함께 앉을 수 있는 목제 테이블을 두면 좋겠다, 이런 공간이 많아지면 좋을 텐데… 이런저런 마음이 자꾸만 부푸는 곳. 일상에 가려져 납작해져 버린 삶에 다시 꿈꾸는 힘을 실어주는 공간. 나에게 먹집은 충분히 청도를 올 만한 이유가 되었던 것 같다. 먹집 운집을 떠나며 이곳을 ‘꿈꾸는 오두막’이라는 나만의 별명을 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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