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책에게 온전히 집중할 공간
TRAVEL ㅣAPRIL 2020
스테이폴리오 '트래블'은 작가와 함께 폭넓은 스테이 경험을 소개하는 콘텐츠입니다.
글ㆍ사진 ㅣ변진혁
번호 키를 누르면서도 '이 집이 맞나' 싶다. 다행히 일독일박(一讀一泊)이라 쓰여있는 작은 명패가 눈에 들어온다. 단단한 나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아늑하고 소박한 중정이 손님을 반긴다.
방에 짐을 풀기 전에, 중정부터 둘러보기로 한다. 족욕탕이 있고, 그 앞에는 흰 자갈이 있고, 앙상한 나무가 있고, 낮은 담벼락이 있고, 침실과 다이닝룸이 양쪽에서 포근하게 나를 감싸고 있다. 동절기라 족욕탕에 물을 받을 수 없어 발은 조금 시리지만 잠깐 앉아보기로 한다.
시선보다 약간 높은 담벼락은 아늑하고 적당한 수준에서 프라이버시를 지켜준다. 한옥 곳곳을 비추고 있는 노란 조명 덕분인지 추운데도 그리 춥지 않게 느껴진다. 파랗다가 검어지는 하늘을 보고, 다시 정면의 나무를 보고, 한옥의 모습을 이리저리 감상한다. 초여름에는 해가 떨어질 때 즈음 여기 앉아 차를 마시면서 책을 읽으면 참 예쁘겠다 싶었다.
다이닝 룸에서 큰 창을 열면 중정이 보이고, 거실에서도 창을 열면 중정이 보인다. 모든 창을 다 열어두면 거실에서 다이닝 룸을 볼 수 있고, 다락에서 중정을 볼 수도, 거실을 볼 수도 있다. 중정은 마치 누구나 보고 싶어 하는 연예인 같구나.
조금 오래 앉아있었나 보다. 허기를 느끼며 일어난다. 간단히 짐을 던져두고, 저녁 식사 준비를 했다. 공간에 비해 여유로운 부엌이 매력적이다. 다이닝 룸을 가득 채울 많은 음식도 즐겁게 준비할 수 있겠다. 내가 그럴 일은 없지만. 아무튼, 거실과 부엌은 생각보다 좁지 않았고, 넷이 지내기에도 충분한 공간이었다.
보통 서촌에 놀러 오면 밥은 사 먹기 마련인데. 이 날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전날 미리 마켓컬리에서 주문한 소이연남 쌀국수, 미트볼 등을 간단히 조리해서 한 상 차리고 밥을 먹었다. 식당에서 사 먹는 것보다 비싼 것 같은 느낌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식과 맛으로 상을 채워두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
일독일박은 바깥에서, 혹은 안에서 보는 모습 모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한옥의 모습을 하고 있고, 그런 감성이 느껴진다. 그러나 오래되거나 낡지는 않았고, 요즘의 손길로 잘 매만지고 마무리해두어서 한옥이 가지는 불편한 부분(예를 들어 난방이라든지)은 느낄 수 없었다.
거실 한편에는 옷걸이, 책장, 그리고 아이패드와 연결된 홈 팟 스피커가 놓여있다. 시리(siri)를 호출해서 음악을 조절하거나, 실내조명도 제어할 수 있다. 조도를 낮추거나, 특정 공간의 조명만 끄거나 등등.. 클래식한 한옥에서 만나는 최전선의 IoT 기술이 재미있다.
창가에는 작은 티 테이블이 있고, 옆에 있는 큰 창을 열면 중정을 지나 다이닝 룸까지 시선을 옮길 수 있다. 일독일박의 모든 창을 다 열어두면 개방감이 상당히 좋다. 집 안에 있는데 마치 커다란 정원 가운데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1층의 침실. 크고 푹신한 베드, 예쁜 노란 조명과 책이 놓여있는 작은 테이블의 심플한 구조. 일독일박에서는 어느 공간에서나 책을 만날 수 있다. 눈길이 닿는 곳곳에 책이 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책을 안 볼래?' 같은 느낌일까. 궁금해서라도 한 번 넘겨볼 수밖에 없다.
침실에도 중정을 향하는 큰 창이 있다. 살짝 보이는 중정의 모습은 절반의 담벼락, 절반의 한옥, 쓸쓸한 나무 한 그루가 주인공처럼 서 있다. 마치 한옥을 소재로 한 커다란 프레임의 풍경화 같기도 하다. 날씨가 따뜻하면 이 창을 열어두고 하루 종일 침대에서 나가지 말고 뒹굴뒹굴해도 참 좋겠다.
돌아 나와 다시 현관을 지나 침실의 반대편 방향으로 오면 다이닝 룸이 있다. 커다란 테이블이 있고, 책이 있고, 역시 중정을 볼 수 있는 커다란 창이 있다. 시간이 늦어서 창은 닫아두었다. 추위보다는 안에서 새어나갈 혹시 모를 소음이 걱정되어서. 서촌은 낮은 담벼락만큼 조용한 동네이고, 많은 사람들이 주거하는 곳이기도 하다.
다이닝 룸의 조명이 특히 마음에 든다. 너무 밝지 않게, 책에 집중할 수 있는 은은한 조도로 설정되어 있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직접 조명보다는 간접 조명에 조금 더 의지한다. 덕분에 아늑한 느낌도 들고, 소파에 기대거나 누워서 힘 빼고 있기에 참 좋다. 책을 보기에도, 낮잠을 자기에도, 적당한 술이나 커피와 함께 수다 떠는 시간을 갖기에도 참 좋다. 잠들기 전까지 계속 다이닝 룸에서 무언가를 했다. 참 매력적인 공간이다.
화장실. 작아 보이지만, 안쪽에는 욕조도 있는 넓은 공간이다. 어메니티는 이솝. 수건은 거실에 넉넉히 준비되어 있으니, 미리 챙겨서 들어가야 난감한 상황을 피할 수 있겠다.
화장실 옆에는 가파른 계단이 있다. 조심조심 발밑과, 머리와, 손 디딜 곳을 잘 보면서 올라가도록 하자. 다락방을 올라가는 순간의 설레는 마음은 나이를 먹어도 여전한 것 같다.
다락. 천장이 아주 낮으니 조심, 또 조심. 예상보다 꽤 넓은 공간이었다. 2인 침구류가 준비되어 있고, 역시 여기에도 시선이 닿는 곳에는 여지없이 책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락이라 걱정했는데 춥지는 않았다. 다락을 위한 에어컨이 별도로 있어서 여름에도 지내기 나쁘지 않겠다. 알록달록하고 다양한 판형의 책이 인테리어 소품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낮은 천장의 다락에 누워 서로 얼굴을 보며 그동안 못한 얘기들을 나눌 수도 있겠지만, 모든 사람이 넉넉한 이야깃주머니를 갖고 다니지는 않는다. 심심하다 싶으면 가볍게 책을 몇 장 읽어도 좋고, 한편에 놓여 있는 방명록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조금 끄적여봐도 좋을 것 같다.
다락의 작은 창을 열면 중정을 아래로 내려볼 수 있다. 내다보기 위한 창이라기보다는, 기분 좋은 공기가 들어올 수 있도록 열어두는 바람구멍 같은 느낌이다. 솔솔, 발 바닥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책을 보고 있으면, 아무리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어도 금세 노곤해지지 않을까.
집 구경을 마무리하고, 간단히 술 상을 준비했다. 조금 더 신경을 써서 하루 일찍 준비하니 안주가 평소보다 구성이 좋아졌다. 밤이 늦었으니 홈 팟의 볼륨은 조금 낮추었지만, 조명은 일단 그대로 두었다. 당장은 술이 아쉬우니, 책은 내일 아침에 보기로 한다. 소파에 기대고 누워 미뤄두었던 영화를 보다가,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아 화면에 떠다니는 텍스트를 몇 줄 읽다가, 다시 소파에 기대 유튜브를 잠깐 보다 보니 빈 맥주병이 조금 늘어났고, 시간은 새벽이었다. 이대로 다이닝 룸에서 잘까 했지만, 그래도 침실이 있으니까.
평소보다는 조금 늦게 일어났다. 창을 밀어 열고, 다시 눕는다. 월요일 아침이라 바깥에는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린다. 크게 거슬리지는 않는다. 적당히 포근한 햇볕 탓을 하며 침대에서 조금 더 시간을 뭉개본다.
꽤나 깊게 숙면했던 것 같다. 적당한 조도의 실내조명, 사람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한옥 덕분인지, 낯선 장소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은 것 같다. 돌아다니면서 닫힌 창을 모두 열어 환기도 조금 시키고, 자연광이 비쳐주는 일독일박을 구경하기로 한다.
부엌 바깥으로 조금 소란스럽다. 차들이 다니고, 출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터벅터벅, 들려온다. 월요일 아침에 즐기는 여유로움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소음이기도 하다.
다이닝 룸은 자연광만으로는 환하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덕분에 음영이 생기고, 적당히 몸을 구겨 넣고 활자를 보기에 좋다. 아닌가, 환해야 눈 건강에 좋은 건가. 어쨌든, 아침부터 다이닝 룸은 분위기 좋았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다이닝 룸 한편에 무심한 듯 쌓여있는 책들은 그냥 보기에도 참 예쁘다. 나도 집에 책을 저렇게 쌓아둬 볼까 봐. 창을 활짝 열고 한옥을 보고, 하늘을 보고, 처마와 하늘을 함께 본다. 세수도 해야 하고 밥도 먹어야 하는데, 모조리 미뤄두고 이 창 틀에 앉아 멍하니 하늘이나 계속 보고 싶어졌다.
무거운 엉덩이를 겨우 떼어내고 다락을 잠깐 올라가 본다. 천장에 뚫린 작은 창은 마치 무드 등처럼 하얀 빛을 내려주고 있었고, 발치의 중정을 향하는 창도 적당히 밝은 빛을 내고 있었다. 조명을 켜지 않아도 따뜻하고 포근해 보인다. 한옥이라 참 좋다.
티 테이블 옆의 창을 활짝 열었다. 그래도 아직 겨울 공기라고, 찬 바람이 훅 들어와 남은 잠을 모두 날려보낸다. 기분이 상쾌해진다. 조금 춥지만 잠깐 열어두기로 한다.
중정에 자리한 나무는 아침에 보니 더 앙상한 것 같은 느낌이다. 파란 잎이 많이 붙어있으면 꽤 이쁜 모습이겠거니, 상상을 해본다. 그러나 상상력이 부족한지 흥미가 금방 사라진다. 커피 마실 시간인 것 같다.
빈 브라더스의 드립 백이 준비되어 있었다. 물을 끓이고, 커피를 내리고,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스테이 이름부터 일독일박인데, 책이라도 한 권 읽어야겠다 싶어서 미리 준비했다. 너무 내밀한 에세이는 싫었고, 트렌디한 베스트셀러 역시 흥미가 가지 않았다. 장르 문학 쪽을 뒤적거리다 보니 '냉면'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붙은 파란색 표지가 눈에 띄었다. 난 냉면을 좋아하니까.
창문으로 들어오는 찬 바람을 맞으면서 냉면을 소재로 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고 있으려니, 우래옥이 몇 시에 여나 갑자기 궁금해졌다. 꾹 참고 커피를 대신 밀어 넣고, 다시 책에 집중했다. 탁자에 기대앉아 조금 읽고, 허리가 당겨서 다이닝 룸 소파에 누워 조금 더 읽고, 침대에 엎드려 마저 읽었다. 기대한 만큼 쉽고 즐겁게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취향에 꼭 맞는 책을 읽을 때의 행복한 감정을 오랜만에 느꼈다. 냉면, 냉면, 냉면.. 을 계속 봐서 그런가. 책을 덮으니 배가 고파졌다.
베이컨을 조금 굽고, 샐러드를 담고, 빵을 데워서 커피와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되게 많이 준비한 것 같았는데, 먹다 보니 어느새 빈 그릇만. 오랜만에 책을 봐서 그런지 칼로리 소모가 심했나 보다. 느긋하게 식사를 즐기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을 지나 체크아웃 시간이 다가왔다. 괜한 아쉬운 마음이 남는다. 어제저녁에도 책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
책이란 물건이 새삼 신기하다. 그 작지 않은 부피감 안에 들어있는 콘텐츠는 까만색 잉크뿐이다. 네모 반듯하지만, 좀처럼 혼자 서 있기는 힘든 편이다. 혼자 두면 아주 많이 허전해 보이지만, 몇 권을 쌓아두거나 서로 기대 두기라도 하면 그 모양이 예쁘기도 하고, 거울보다 더 세밀하게 집 주인의 내밀한 취향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일독일박에는 많은 책이 있다. 그저 낱권을 바라보면, 그런가 보다 한다. 다락도 올라가 보고, 다이닝 룸도 둘러보고, 거실 서랍의 책도 보고, 심지어 침대 사이드 테이블에도 놓여 있는 책을 둘러보고 나면 일독일박의 취향이 슬쩍, 보이기 시작한다.
출퇴근길에 이리저리 치이면서 겨우 몇 장 보던 시간 말고. 점심시간 겨우 쪼개고, 그것도 부족해서 잠잘 시간도 쪼개서 자기 계발서 읽던 시간 말고. 하루, 아니 반나절만이라도 온전히 내가 좋아하던 장르의, 작가의 책과 함께 보내 본 시간이 언제인지 기억나는가.
예쁘고 포근한 한옥에서, 예쁜 중정에서 족욕하면서 사진도 찍고, 예쁘게 플레이팅해서 밥을 먹고, 평소 하던 것처럼 수다를 떨고, (TV는 없으니) 유튜브 혹은 넷플릭스를 보다가 잠에 들고, 다음날 역시 그렇게 하다가 느지막이 나오는 것도 물론 좋지만.
조금 덜 예쁘더라도. 어깨에 힘을 조금 빼고, 좋아하는 차를 한 잔 우려내어 책을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책을 준비해 오지 않아도 좋다. 많은 사람들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좋은 책이 일독일박에는 아주 많이 있다. 마음에 드는 두께의, 표지의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구절이 나오면 오랜만에 연필을 쥐고 필사도 해보자. 생각보다 재미있고, 멋있다.
한동안 책이 재미없었다. 오랜만에 책이 재미있었다. 온전히 책을 보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고민해서 책도 미리 골랐고, 진지하게 독서에 몰입했다. 일독일박 덕분에 그동안 알면서도 잊고 지내던, 책과 함께하는 시간이 갖는 무게감 있는 매력을 다시 끄집어낼 수 있게 되어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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