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를 너무 쉽게 규정한다.

집단적 광기

by 지향

<관계란 서로에 대한 이미지를 갖지 않는 것이다>

오래전, 크리슈나무르티의 이 문장 앞에서 나는 숨이 멎는듯 했다.

이 땅의 언어라기보다는 천상의 어디쯤에서 흘려보낸 소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갖지 않는, 관계의 비밀을 살기 시작한 무렵이었기에 그 말이 들렸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야 알아차린다.

'나'는 고정된 한 개체가 아니라

시시각각으로 흐르는 기운이라는 것을.

그래서 더는 부딪칠 단단한 실체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와 타인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기 위해 애쓰는, 사회적 합의를 때때로 의심한 적은 있었지만

그 바깥으로 나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름 외모 학벌 직업 소유 혈액형,

심리 검사를 통한 MBTI, 애니어 그램까지.

알면 알수록 이미지는 더 단단해졌고, 아무리 좋았던 이미지조차 결국에는 지루하고 답답한 감옥이 된다는 사실을 충분히 겪고 배웠다.

한 개인의 생각 감정 태도라는 것도 각자의 경험 세계 속에서 주입되고 길들여진,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도 이제는 분명해졌다.​


근원과 연결된 무한한 신비를 작은 파편으로 격하시켜 온, 집단적 광기를 나는 비로소 알아차린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조차 만족할 수 없었고, 더욱이

만족스러운 관계란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음을 조용히 돌아본다.​


난 여전히 네 자녀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이며 집단의 한 구성원이라는

이미지를 알고 필요에 따라 즐긴다.

다만

이미지의 포로가 되는 순간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그때마다, 한 걸음 물러선다.

나는 지금,

광활한 기운의 흐름 속에 있다.

거대한 땅에 두발을 딛고 서서,

매일 마주하는 하늘 태양 달 별 숲 바람과 함께 한다.

그 사이를 돌고 도는

우주적 기운이 나의 숨결이 되고


돌고 돌아 흐르는 물이 나의 생명수임을

고요히 알아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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