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락하지 않고 산다면 by 벨라Lee]를 읽고
벨라Lee 작가는 [연락하지 않고 산다면]에서, 스마트폰 화면에 뜬 익숙한 이름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때가 있다고 했다. 상대가 싫어서가 아니라, 어떤 때는 누군가의 감정을 받아낼 마음의 ‘에너지 잔량’이 부족해서라고…
‘타인과 연결되지 않을 권리’, 그 당연한 자유가 왜 우리에게는 어려운 숙제가 되었을까. 작가는 그 글에서 우리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안도감‘만큼이나,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권리’도 필요하다고 착한 목소리로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여기서 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SNS 프로필 하단에 ‘상태 메시지’ 대신 ‘연락 거부 지수’, ‘공감 에너지 잔량 지수’, ‘바쁨 지수’를 숫자로 표시할 수 있다면 어떨까.
이런 직관적인 수치가 있다면, 작가의 고민처럼 ‘지금 회의 중이라,‘ ’운전 중이라 나중에 연락할게,‘ 같은 핑계를 덧붙일 필요도 없지 않을까. 어느 선 까지는 걸러지지 않을까. 거절이 서툰 사람들에게 그 숫자는 든든한 방패가 되어줄 것만 같다.
그런데 작가의 글을 읽다 내어놓은 참신한 아이디어에 아내가 한마디 한다.
“글쎄, 사람들은 그 지수를 보고 또 말하겠지. 왜 맨날 100%냐고, 유난 떤다고. 또 낮은 수치가 계속되면, 억측들로 시작된 난데없는 소문들이 돌 테고.”
맞는 말이다. ‘관계의 기술이 발달할수록 우리는 더 정교하게 서로를 감시하고 평가하게 된다.’라고 누군가 말했던 것 같다.
결국 기술적 장치가 생긴다 한들, 우리는 ‘관계의 눈치’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숫자가 생기면, 그 숫자를 관리하느라 또 다른 에너지를 써야 할 테니까.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다정함의 대가가 나의 소진이라면, 그 관계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다정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지킬 ‘안전거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런 좋은 친구가 있다면 귀한 줄 알고 오래 같이 갈 수 있게 보호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문장이 더욱 마음에 남는다.
“가급적 친목은 얼굴을 보면서 하고 싶다.”— [연락하지 않고 산다면, 벨라Lee] 中
그 안에는 단순한 만남의 방식 이상의 태도가 읽힌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천천히 차오르고,
달력을 들춰 적당한 날을 고르고,
어디서 만날지 고민하고,
거울을 한번 더 보고,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나서는 시간들.
우리는 이미 그 과정 속에서 한 번 더 상대를 생각하고, 마음을 정돈하며, 관계를 준비하는지도 모른다.
디지털 소통은 빠르고 효율적이나, 준비의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전화벨은 예고 없이 울리고, 메시지는 마음의 속도와 무관하게 도착한다. 설렘도, 망설임도, 숨 고를 틈도 생략된 채로.
어쩌면 얼굴을 본다는 건 단지 물리적 거리를 줄이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을 향해 시간을 써서 마음을 이동시키는 과정을 온전히 감당하겠다는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휴대폰 화면이 조용히 깜빡인다. 예전 같으면 서둘러 답장을 보냈겠지만, 오늘은 잠시 화면을 뒤집어 둔다. 내 마음의 바쁨 지수는 숫자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연결을 멈추고 숨을 고르는 ‘침묵’으로 지켜내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