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기획안은 대학생이 제출한 리포트 같아요]
첫 번째 전시는 '생물' 관련 전시였다.
콘텐츠 자체가 흥미로웠지만 전시 현장에서 모든 걸 컨트롤 하기에는 내 능력이 너무 부족했다.
회사 동료는 발주처 담당자가 모 전시 회사에서 10년간 일했던 베테랑이며 성격도 보통이 아니라고 미리 주의를 주었다.
그녀는 피부가 하얗고 금색 테를 두른 안경을 썼었다. 회의를 할 때 머리카락을 풀다, 묶기를 수시로 반복했다. 일종의 틱 증상인가 의심이 될 정도로 고개를 수시로 쳐들었다. 회의를 마치고 콘셉트 가안을 보내기로 했다. 콘셉트 기획안을 정리하려는데 잠이 밀려왔다. 이 정도면 되겠지 생각했다. 그 글은 마치, 나도 이해가 안 되는 내용을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서 그럴싸하게 포장한 그런 글이었다. 만약 그 글을 본 어떤 이들이 '아, 좋네요.' 하면 그들이 멍청한 거고, 어떤 이들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요? 제가 머리가 나쁜지 이해가 안 되네요.' 라고 하면 그들은 제 정신인, 그런 글이었다. 전시 담당자를 보조하는 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제 정신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네요. 몇 번째 몇째 줄, 이게 뭔가요? 몇 번째 몇째 줄 여기는요? 따지듯이 묻는 그녀에게 기분이 상했고, 무엇보다 창피했다. 서투르게도 나도 그 사람의 말투로 똑같이 응대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발주처 전시 담당자에게서 메일이 왔다.
'보내주신 자료는 대학생 리포트 같습니다. 콘셉트 다시 기획해서 보내주세요'
회사의 대표님과 팀장님 그리고 프리랜서 기획자에게까지 CC를 해서 보냈다. 전시를 시작하고 가장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콘셉트 시작부터 설득이 되지 않았다. 나도 이해되지 않는 두루뭉실한 내용으로 남을 설득할 수는 없다. 내가 이해되고 설득이 되어도 남을 설득하기 힘든데 말이다.
[욕받이]
현장에서 보는 그녀는 늘 팔짱을 꼈다가 안경을 들어 올리며 이야기했다. 흥분하면 얇은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 옆을 지나갈 때는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짧게 “쯧” 하고 혀를 차곤 했다. 그래서 나도 들릴락 말락 똑같이 응대했다(소심한 복수였다). 아마 당시 그녀가 '지금 무슨 소리 냈냐?'고 따져 물었다면, 사탕 빨아 먹다가 난 소리라고 했을 거다. 현장에서 그녀를 마주칠 때는 늘 긴장이 되었다.
현장을 컨트롤해야 하는 것이 부담되긴 했지만, 전시 초반에는 의욕으로 가득 차 있어 현장은 신기하기만 했다. 모든 게 새롭고 재밌게만 보였다. 베테랑인 그 담당자가 보기에 나는 한참 아래의 신참이었다.
현장 관리의 역할보다는 전시 담당자가 시간과 관계없이 지금 이렇게 다시 바꿔보자, 저렇게 바꿔 보자고 번복하면, 난 그 자리에서 현장 팀을 설득하면서 다시 변경한 것이 대부분이다.
어느 순간부터 현장 시공팀은 야수가 되어갔다. 며칠 밤을 새우면서 현장에서 설계 변경하기를 반복하니 예민함이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서 난 욕받이였다. 클라이언트, 현장팀, 회사 대표님까지 모두가 나에게, 불만은 어마어마했다. 담당인 내가 겪어야 할 당연한 일이겠지만, 당시에는 너무 무겁게만 느껴졌다. 이 스트레스는 집으로 옮겨졌다. 나는 현장에서 욕받이의 임무를 마치고는 집에 가서 가족들에게 성질을 내며 꽥꽥거렸다.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집에서 이렇게 하는 거 반만큼만 너희 회사가서 해봐라아앜!!! 다 놀라자빠질 거다!!!' 그렇다. 그들은 놀라자빠질꺼다.
그래도 어떻게 어떻게 해서 결국 전시는 마무리되었다. 그녀의 깐깐함 때문인지 설계 안보다 전시가 더 잘 나오기는 했다.
[반 물고기]
가장 기억에 남았던 순간은, 전시가 오픈하고 난 후다.
전시의 메인 콘텐츠인 '돛새치 표본'은 한 달 정도만 임대 전시한 후 다시 원래 있는 장소로 옮겨질 예정이었다. 우리는 돛새치의 자리가 비워지지 않도록 비슷한 크기의 돛새치 모형을 구입하여 대체하기로 했다.
나는 구글링을 통해 신중에 신중을 기해 미국 어느 회사의 돛새치 모형을 구입하였다. 직구로 1,000달러 정도 선이었다.
돛새치 모형의 도착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왜 아직도 도착하지 않는 거냐는 전시 담당자의 독촉 전화는 계속되었다. 매일 출근 후 핸드폰 벨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했다. 내 사업을 도와주던 회사 후배를 괜히 들들 볶았다. "빨리 확인해 봐, 여기에서 도대체 언제 보내고 도착하는지, 기관에서 계속 전화 오잖아. 메일이 안되면 지금 당장 통화라도 해봐!" 난 영어로 통화하는 게 정말 싫어서 답변이 늦어도 메일로 문의했으면서 말이다. 발주처에서 또 연락이 왔다. 돛새치 모형이 도착했다는 기쁜 소식이었다. 그런데 담당자 그녀의 목소리는 현장에서 뭔가 일이 잘 안될 때 자주 듣던 얇고 높은 톤의 목소리였다.
"박스를 열어봤는데, 돛새치가 반쪽만 있어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죠?"
"반만 형태를 띠고 있다고요! 전체 모습이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행잉형태로 전시를 하기로 했잖아요. 이거 어떻게 할 거예요? 몰라요. 일단, 현장으로 오세요”
전화를 받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왜 나에게는 이런 일만 일어나는가?’ 갑자기 나 자신에게 너무 짜증이 났다.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흘렀다.
직접 가서 확인한 그 모형의 모습은 정말 처참했다. 반은 평평한 석고 형태, 반은 입체형의 돛새치의 모습. 한쪽은 흰색이고 한쪽만 돛새치의 형태를 띤 이 모형의 모습에 소름이 끼쳤다.
분명히 홈페이지에서는 한 마리의 완벽한 형태였는데, 입체적으로 전시를 해야 하는 공간에 반쪽만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눕혀도 보고 별 수를 다했지만, 그 넓은 공간을 대체하기에는 부족했다.
반품하건, 교환을 하건, 새로 구입하건, 돌이키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다. 찬란한 모습을 한 그 돛새치 표본의 임대 기간은 이미 끝났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우리는 결국, 전시장 뒤쪽의 벽에 그 모형을 붙이기로 했다. 그리고 그 공간은 다른 전시물로 대체했다.
전시가 끝난 후 담당자 그녀를 빨리 잊고 싶었다. 거기서 고생한 일을 빨리 잊고 싶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때가 가끔 생각난다. 당시,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전시가 좋아요?" "네, 전 좋아요."
싸한 웃음을 지어 보인 그녀는, "난 정말 전시가 지긋지긋해"라고 말했다.
그런 그녀도 아직 전시를 하고 있다. 그녀와는 다시 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그녀가 있어서 더 좋은 전시가 나온거라는거는 부인하기가 어렵다. 전시가 지긋지긋하다지만 그녀만큼 현장에서 책임감을 가지고 전시를 관리 감독한 사람을 별로 만나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