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 그것이 또 꿈틀거리려 할 때 나는 두려웠다.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라 반갑기도 했지만 사실 그보다 난 무서웠다. 내 머릿속에서 다른 것들에 가려보려고도 하고 지워보려고도 했다. 역시나 다른 무엇인가에 가려지거나 지워지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몰래 존경하고 애정 품기.
나는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었지만, 마치 그를 오래 봐왔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느껴지는 이유는 내가 온종일 그를 생각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떨쳐낼 수 없는 마음이 점점 커지고 기대도 커지고 몇 달의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집착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 것이리라. 이 집착은 나의 것이고 이 마음도 나의 것이었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도록 고이고이 감싸고 내 맘에 싹을 틔우고 물을 주니 제법 많이 자랐다.
그 사람의 감시 아닌 감시를 하는 내가 알아낸 것은 내가 그 사람과 깊지 않은 깊은 이야기를 꽤 많이 나누었다는 것과, 그 사람이 어떤 한 여자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 또 한 여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려웠다. 애초에 어떤 관계도 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나와는 어떤 관계도 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은 늘 혼자이길 바랐던 것이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이기적인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말 내가 그동안 기도해왔던 조건에 누구보다 부합하는 사람이었으니 내 맘이 움직이는 것은 당연했던 것 아닐까. 정말이지 작은 것 하나하나 모두 맞아들었다. 때문에 그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 서울에 와서 일하는 자신에게는 이 곳이 낯설고, 이 낯선 곳의 사람들은 사실 조금 편협하기도 하다는 고백, 또 내가 하고싶은 것들에 대한 진심어린 조언과 더 나은 방향으로써의 제안이 담긴 대화들. 내겐 너무나 행복한 대화인 동시에 너무나 힘든 대화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분이 자주 쓰던 '편협'이라는 편협한 단어를 나는 사랑하게 되었고, 그의 말투를 때때로 도둑질하기도 한다. 그것이 나의 소소한 즐거움이기도 하다.
어찌하다 보니 그동안에 나는 그 사람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사람도 나의 비밀한 이야기를 알게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이 그 사람만이 아니듯이, 그 사람도 많은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했을 것이었다. 내 마음대로 그 사람을 내 생각에 대입시키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꼭 그를 조만간에 다시 만날 것 같은 기대를 갖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마음이 아픈 것은 그 사람이 만남의 약속을 제시하여도 나는 그 자리에 나가지 못할 거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나는 애초에 뒤틀린, 만나 지도, 만날 일도 없을 그를 사모하곤 했다.
그렇게 다시 몇 달, 그의 곁엔 그가 그때에 좋아하던 여자가 함께하고 있다. 다른 여자 곁에서 그녀를 지키는 그의 모습은 꽤나 듬직해 보인다. 때문에 나와는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질 수 없었고, 대화를 할 수 있었을 때 더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음을 후회할 뿐이다. 나는 가까웁지도 멀지도 않은 이곳에서 그의 행복을 빌어주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