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이 남긴 위안
잠 못 이루는 이른 새벽,
TV 속 ‘인간극장’을 보다가 문득 얼음을 동동 띄운 냉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달구어진 몸과 마음을 잠시 식혀줄 쉼표같은 무언가가 필요했을까.
얼음은 커피 위에 떠 있다가 서서히 녹아내린다. 투명한 조각이 흐릿해지며 커피 향을 삼키는 시간은 내 삶을 닮았다. 날카롭던 기억이 무뎌지고, 선명한 감정이 옅어지듯. 그러나 사라짐이 끝은 아니다. 얼음이 녹은 자리에 새로운 맛이 스며들고, 그것은 소멸이 남긴 흔적이 된다.
본래 뜨거워야 할 커피가 차갑게 식어가는 길은 역설이다. 뜨거움 속에 숨은 차가움이거나, 차가움 속에 느슨해진 뜨거움이거나 수시로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내 감정과 닮았다. 기쁨과 슬픔, 분노와 용서가 교차하는 한가로운 지점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처럼.
얼음은 곧 사라지지만 그 흔적은 남아 삶의 여백을 다른 맛으로 채운다. 그 자취야말로 나에게 건네는 선물일지 모른다.
그래서 냉커피 한 잔은 고단함 속의 쉼, 뜨거움과 차가움의 공존, 소멸이 남긴 위안을 동시에 품고 있다. 새벽의 정적 속에서 홀로 마신 냉커피는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사라짐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 흔적은 또 다른 맛이 되어 삶을 지탱해 줄 테니까요.”
지겹도록 더디게만 흐르던 지난 여름의 한복판, 에어컨을 고치러 온 기사님께 물 대신 시원한 냉커피 한 잔 건넸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을.
그 작은 배려조차 놓친 나의 둔감을 조용히 탓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