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파킨슨 이야기

감각의 무질서

by Surelee 이정곤

감각의 무질서


내가 파킨슨을 친구 삼은 지 여덟 해.
그 인연은 운명이 아니라,
오랜 세월 몸이 보낸 신호를
내가 무심히 흘려보낸 결과였다.
숨길이 막히고,
들숨과 날숨의 균형이 깨졌을 때
나는 이미 질서의 끈을 놓고 있었다.
호흡이 흐트러지자
몸의 리듬이 흐트러졌고,
몸이 느려지자
세상은 나를 앞질러 갔다.
파킨슨은 내 감각의 속도를 늦추었다.
촉각도, 청각도, 미각도
모두 한 박자씩 느리게 반응한다.
그러나 느린 것은 몸뿐이었다.
마음은 오히려 더 빠르게 달렸다.
굽이진 길 위를
몸은 천천히 걷는데,
마음은 초고속도로 위를 달리듯
조급함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이 괴리 속에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몸은 ‘멈추라’ 신호를 보내지만
마음은 ‘서둘러라’고 외친다.
느림과 속도의 간극 속에서
삶은 삐걱거리는 수레처럼 흔들렸다.
시간은 느리게 흘렀지만
불안은 빠르게 자랐다.
내 안의 감각이 둔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소낙비 같다.
노화로 인한 기능 저하라기보다
갑작스럽게 작동하는 고장난 스위치처럼,
활성과 비활성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손떨림은 모든 감각의 퇴화를 자극한다.
약 기운이 바닥을 칠 때면
옷을 입거나 벗는 일이
암반을 오르는 일처럼 버겁다.
소근육 하나 움직이려 해도
천근만근의 무게가 어깨 위에 눌린다.
샤워 중 비누칠, 샴푸 사용, 물의 온도 조절, 양치질, 수건 사용, 그리고 옷 입기 등 어느 것 하나 무겁다.
이 모든 일상이 슬로우 모션처럼 흐른다.
몸을 조이는 옷은
숨막히는 두려움을 불러오고,
너무 헐렁한 옷은
잠자리에서조차 몸을 거슬린다.
귤 껍질 하나 벗기기가
손떨림에 과업이 되고,
새우 껍질이나 생선 가시는
고단의 끝자락이라 섭취를 포기하기 일쑤다.
이처럼 단순한 동작들이
이젠 하루의 도전이 되고,
감각의 세계는 조금씩 무너져간다.
소근육의 경직은 나의 언어감각을 흐트러 놓는다.
호흡불량이 이어지며
혀의 근육과 입안의 구조가 미묘하게 틀어진다.
말은 목구멍에서 미끄러지지 못한 채
안개 속을 헤매이고,
발음은 이내 자신감을 갉아먹는다.
말의 경계가 흐려지자
나는 사람들의 표정을 먼저 읽는다.
대화는 점점 눈빛과 침묵의 영역으로 옮겨간다.
혀는 꼬이고, 발음은 뒤틀리고,
내 말은 내가 낯설게 들린다.
소리를 내는 일은 더디고,
소리를 삼키는 일은 익숙해진다.
언어감각의 퇴화는
자존의 뿌리를 뒤흔든다.
말을 더듬는 순간,
내 존재의 선명함이 흐릿해진다.
‘나’라는 이름이 말 속에서 미끄러질 때,
절망은 상한가를 친다.
그러나 그 절망의 바닥에서
나는 또 다른 언어를 배운다.
그건 말이 아니라,
느낌으로 말하는 언어였다.
눈빛이 말을 대신하고,
손끝의 떨림이 마음의 문장을 완성한다.
침묵은 더 이상 결핍이 아니라
내가 쓸 수 있는 가장 깊은 시(詩)가 된다.
감각의 무질서는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감각을 깨우기 위해 찾아온 손님이었다.
듣는 대신 느끼고,
말하는 대신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그러나 깊게
세상과 다시 연결된다.
파킨슨은 내 몸을 느리게 만들었지만
그 느림이야말로
나를 지금 이 자리에 단단히 붙잡아두었다.
무질서 속에도 질서가 있고,
혼란 속에도 깨달음이 있다.
나는 이제 삶의 진짜 속도는
빠름이 아니라,
멈춤과 기다림 사이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알아간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감각의 불협화음을
조용히 한 편의 음악으로 바꿔 부른다.
그 느린 선율 속에서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