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WAY2GO 영광

탓과의 전쟁

탓이라는 잡초, 평화라는 꽃

by Surelee 이정곤


어느 날 우리집 터밭에서 이상하게 생긴 식물 하나를 발견했다.
줄기는 어설프게 비틀렸고, 잎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생김새였다.
도무지 정체를 몰라 이웃에게 물었더니,
“그거? 탓이라는 잡초야. 요즘은 집집마다 무성하게 자라서 골칫거리야.”
웃으며 던진 그 한마디가 묘하게 마음에 박혔다.
요즘 재심과 현희도 그 이야기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주말마다 현희네 집 정원 가꾸기에 여념이 없는 두 여인은 잡초 제거에 가장 많은 시간을 쓴다.
그런데 아무리 뽑아도 다시 고개를 드는 잡초가 하나 있다.
“얘는 뿌리가 아주 깊어. 이름도 특이해. '탓'이래.”
재심이 웃으며 말한다.
이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다시 자라고,
웬만한 집에서는 이걸 아예 포기하고 그냥 함께 살아간다고 한다.
남탓이라는 잡초.
생각해보면, 우리 마음에도 참 자주 자란다.


남탓은 위로처럼 자란다

남탓은 순간의 위로다.
“왜 그 사람이 그랬을까.”
“그때 그 말만 안 했어도…”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나는 내 잘못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얻는다.
하지만 그 안도는 오래가지 않는다.
남탓은 일시적 위로는 줄 수 있어도, 내 삶을 바꾸진 못한다.
그 위로가 계속되면, 결국 나는 내 삶에서 멀어진다.
남이 주도하는 인생을 살게 되고,
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의 실수 속에 갇힌다.


내탓은 불편하지만, 뿌리를 단단하게 한다

반면, 내탓은 불편하다.
자신을 돌아보고, 나의 기대와 반응, 태도를 되짚는 일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고통은 성장의 기회가 된다.
내가 원인이었다면, 나는 그만큼 바꿀 수 있는 여지도 갖는다.
내 삶의 핸들은 다시 내 손으로 돌아온다.
그럴 때 비로소 내 안에 단단한 중심이 생긴다.
내탓은 자기비하가 아니다.
그것은 책임을 지고, 나를 가꾸는 내적 주체성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늘 조용한 평화가 따라온다.


경계 위의 질문: 누구를 탓하는가

남탓이냐 내탓이냐는 흑백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그 경계 위에 서 있다.
때로는 남탓이 필요하고, 때로는 내탓이 무거울 수 있다.
그러니 중요한 건 단 하나의 질문이다:
“지금 이 감정은 나를 위로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를 자라게 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 솔직해질 때,
우리는 탓이라는 잡초를 그냥 두지 않고 뽑아낼 힘을 얻는다.


재심과 현희의 정원처럼

재심과 현희는 여전히 주말마다 정원에서 잡초와 씨름한다.
가끔은 '탓'이라는 잡초를 일부러 남겨두고 관찰하기도 한다.
“이것도 살아 있으려고 애쓰는 거지 뭐.”
그 말에 현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중요한 건, 그것을 그대로 두지 않는 마음이다.
남탓을 할 수 있는 마음과, 그걸 넘어서 보려는 눈.
그 둘이 함께 있을 때, 마음의 정원은 조금씩 단단해진다.

결론: 탓을 뽑고, 평화를 심는 일

삶은 마치 정원과도 같다.
가꾸지 않으면 잡초는 저절로 자란다.
특히 탓이라는 잡초는, 자라기 쉬우면서도 뿌리는 깊다.
그러나 그걸 발견하고, 이름을 붙이고,
때로는 함께 살아보다가, 다시 뽑아내고,
그 자리엔 평화를 심는 일—
그것이야말로 내가 내 삶을 책임지는 방식이다.
남탓은 순간의 위안이지만, 내탓은 지속가능한 평화를 얻는 길이다.
그리고 그 평화는, 결국 가장 단단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일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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