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WAY2GO 영광

얼음맥주 사용설명서

덥고 낯선 땅에서 생존법

by Surelee 이정곤


1. 작동 준비: 선입견을 내려놓는다

“촌깨오~!”
맥주잔 위로 얼음이 딸랑딸랑 떠다닌다.
처음엔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맥주에 얼음을 넣는다고? 이건 맥주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나.’
20대 후반, 내가 처음 태국에 발을 디뎠을 때,
현지에서 만난 친구가 얼음 가득한 잔에 맥주를 붓는 모습을 보고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거품도 제대로 가시지 않은 잔 속에 둥둥 뜬 얼음 조각들.
그게 맥주인지 냉차인지 분간도 안 갔다.
“진짜 맥주 맛은 희석되면, 그건 맥주가 아니야.”
맥주에 대한 나의 고집은 꽤 단단했고, 쓸데없이 진지했다.
그땐 몰랐다. 문화적 관습이 얼마나 실용적이고, 또 그런 교감이 얼마나 사람 사이를 가깝게 만든다는 걸.


2. 사용 환경: 태국 중남부 반끄릇 해변

24년이 흐른 지금, 나는 태국 중남부 해변 마을 반끄릇에 리조트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 더위, 이 절망적인 기후는 ‘차가운 맥주’조차
몇 분 만에 미지근한 보리차로 바꿔버릴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그 즈음부터 얼음은 배신자가 아니라 구원자였다.
얼음을 띄운 맥주 한 잔은 나를 살려냈고,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먼저 얼음을 찾고 있었다.
“얼음 없이 맥주를 마신다고? 무슨 재미로?”
예전의 나를 정면으로 배신하는 말이지만,
인생은 본디 그렇게 자기 자신을 의도적으로 배반하며 조금씩 편해지는 쪽으로 굴러간다.
나는 그렇게 얼음 맥주와 친구가 되는 데 24년이 걸렸다.
희석된 도수 덕분에 덜 취하고, 더 천천히, 더 오래 마실 수 있는 건 덤이었다.
요컨대, 덥고 목마른 사람에게 가장 합리적인 음주법.


3. 경고 사항 : 유럽인과의 충돌 가능성

하지만 모든 설명서에는 주의사항이 있기 마련이다.
매년 우리 리조트를 찾는 유럽 단골손님들,
독일, 프랑스, 스웨덴, 네덜란드에서 온 이들은
태국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현지 문화를 즐긴다.
시장에선 로띠를 사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 맨손으로 식사도 한다.
그런데 딱 하나, 절대로 용납 못하는 게 있다.

맥주에 얼음을 넣는 일.

“그건 맥주에 대한 신성모독이야.”
“얼음은 물이잖아. 맥주를 물로 만들 셈이야?”
맥주잔 앞에만 서면 그들의 논리는 갑자기 물리학 수준으로 치밀해진다.
그들이 맥주에 관한 선민의식은 거의 종교적이다.
그래서 나는 장난처럼 그들의 잔에 얼음 한 조각을 살짝 떨어뜨려본다.
그러면 ‘오 마이 갓!’이라는 절규가 터지고, 나는 껄껄 웃는다.
그들도 잠시 후 웃음을 터뜨린다.
문화 충돌이 아니라, 문화 놀이.
맥주 위를 떠다니는 얼음 한 조각이, 우리 사이를 떠다니는 웃음 한 조각이 된다.


4. 사용자 후기: 온도와 진심의 거리

이제 나에겐 얼음 맥주가 여름의 상징이다.
그들에겐 냉장 맥주가 고향의 고집스러운 맛일 뿐.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더위를 견디고,
같은 바다를 바라보며, 같은 태양 아래서 잔을 부딪친다.
그리고 결국, 같은 말로 웃는다.

“촌깨오, 우리의 방식대로.”

이것이 얼음 맥주 사용설명서다.
기계적 정답 대신,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적어둔 설명서.
얼음을 넣든 안 넣든,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마신다는 것.
삶의 맛도, 맥주의 맛도 결국은 ‘공유된 경험’ 속에서 완성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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