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장마비가 그쳤다.
어제 오후 도착한 CCTV를 마당 입구에 새로 달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시골살이에 감시 카메라라니…”
잠시 망설이다, 이름을 바꿔 달기로 했다.
See-See TV.
보는(See) 것, 그리고 알아차리는(See) 것.
감시보다는 공감에 가까운 이름이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See-See TV는 단순한 발음의 장난이 아니다.
인간의 삶과 내면을 비추는 시선,
보는 것과 이해하는 것 사이에 있는,
조용하고 깊은 프레임.
그건 더 이상 ‘감시의 눈’이 아니다.
삶의 사소한 진실, 관계의 균열,
그리고 침묵 속의 외침까지 포착하려는,
공감의 눈이다.
귀촌하기 전,
도시에서 엘리베이터를 탈 때면
익숙한 ‘삐’ 소리와 함께
무심코 천장을 올려다보곤 했다.
렌즈 하나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 앞에서 나는 늘 단정한 표정을 지었다.
무표정하지도, 너무 들뜨지도 않게.
불필요한 오해를 남기지 않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조차 나는 나를 연기했다.
요즘은 어디에나 눈이 있다.
지하철 플랫폼 끝에도,
골목 어귀의 문방구 천장에도,
심지어 아이들 노는 그네 위에도.
우리를 ‘지켜보기 위해’ 설치된 눈들은
어쩌면 우리가 ‘스스로를 감추기 위해’
더 조심스럽고, 더 세심해지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 렌즈 속에는
도둑이나 사고만 담기는 걸까?
오래 기다리다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
울다 지쳐 쓰러진 뒤 아무렇지 않은 듯 걸어가는
누군가의 뒷모습 같은 건…
그런 장면도 남아 있을까?
CCTV는 말이 없다.
말이 없기에, 때로 더 슬프다.
우리가 보지 못한 것들을 더 많이 보고,
우리가 잊은 장면들을 더 오래 기억하지만,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 침묵은 때로 싸늘하다.
카메라는 누가 넘어졌는지를 보여주지만,
왜 넘어진 건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누군가를 밀었는지,
스스로 중심을 잃은 건지,
그저 기록할 뿐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우리도 CCTV를 닮아간다.
누군가의 ‘행동’은 보면서,
그 이전의 ‘마음’은 보지 못한다.
판단은 빠르고,
이해는 느리다.
사람의 진심은
카메라가 담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있다.
눈물이 맺히기 직전의 침묵,
떨리는 손끝,
말없이 함께 있는 시간.
기록되지 않지만,
가장 많은 것을 말해주는 순간들.
가끔 되묻는다.
“누가 감시자를 감시하는가?”
이젠 이렇게도 묻고 싶다.
“누가 그들의 고독을 지켜봐줄 수 있을까?”
인생에는 되감기 버튼이 없다.
하필 그날,
하필 그 말,
하필 그 표정.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우리는 머릿속에서 스스로의 ‘녹화본’을
조용히 반복 재생한다.
그건 벌이자,
어쩌면 사랑이다.
지우지 못하고,
되돌릴 수도 없는 순간들을
조용히 품고 살아가는 일.
See-See TV.
단순히 CCTV를 뒤집은 말이지만,
나는 이 단어를 ‘서로를 진심으로 바라보기’ 위해서, 생각을 뒤집어 보자는 것이다.
감시가 아닌 공감의 시선,
판단이 아닌 이해의 눈길.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렌즈가 되어 살아간다.
누군가를 조용히, 진심으로 바라보고 있다.
때론 그 시선 하나가
누군가의 하루를 지탱하기도 한다.
이제부터, 나는 조용히 우리집에 걸린 See-See TV를 통해 나를 보고싶다.
가끔씩이라도 나를 관찰해보고 싶다.
내가 어떻게 걷는지,
어떤 자세로 고개를 돌리는지,
말없이 비추는 햇살 속에서
내가 얼마나 외로운지를...
'하루에 한번쯤은 See-See TV를 보자'.
그 앞에서 말 대신,
시선으로 이렇게 속삭이고 싶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