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WAY2GO 영광

냉장고 이야기

냉장고 길들이기

by Surelee 이정곤


냉장고 길들이기

영광읍내의 작은 식당.
벽 한쪽에 냉장고 하나가 서 있다.
키는 작고, 몸통은 약간 둥글다.
겉면에는 사장님이 붙여둔 장터 전단지와 색이 바랜 메모들이 달라붙어 있다.
팔연이 분주한 일손을 대신해 냉장고 문을 열고 소주를 꺼냈다. 그때 하얀 냉기보다 먼저, 낯설지 않은 냄새와 숙성된 김치의 매운 향이 흘러나왔다.
냉장고는 차가운 기계가 아닌,
이 식당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인 저장고 같았다.
그날 저녁 모임에서 도연이 말했다.
“이 식당은 냉장고가 작아서 좋아.”
그 말이 공중에서 잠시 맴돌다가 스르르 사라졌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서 무엇인가가 파도처럼 조용히 일렁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운전하던 현희가 내 기억의 창문을 열어주었다.
그제야 내안에서 잠자고 있던 생각이 깨어났다.
‘양화가 악화를 구축한다.’
좋은 것이 나쁜 것을 몰아낸다는, 오래된 경제학의 명제를 냉장고에 겹쳐 보니, 욕망과 가치가 차지하는 자리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시장 상인들은 오래된 물건부터 먼저 내어 판다.
그러나 사람의 냉장고 속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겉은 반짝이며 냉기를 품고 있지만,
문을 열면 오래된 것과 갓 들어온 것이 어색하게 뒤엉켜 있다.
그 안에서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자리다툼이 벌어진다.
마음속 냉장고도 다르지 않다.
새로 산 신선한 채소나 과일은 금세 중심 자리를 차지하고,
오래된 잔반은 문틈으로 밀려나듯 구석으로 숨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좋았던 것’마저 변질된다.
그리고 다시 ‘나쁜 것들’의 자리만 넓어진다.
양화가 오래 머무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욕망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목표와 열망이 들어오면
낡은 욕망은 한켠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그 자리를 차지한 ‘새로운 것’도 언젠가 변질되어,
다시 미련과 후회의 구석으로 밀려간다.
좋은 의도가 나쁜 습관을 몰아내는 듯 보이지만,
마음속 냉기는 모든 것을 서서히 식히고, 결국 같은 운명 속에 묶어 둔다.
그래서 냉장고를 비우고 정리하는 일은 욕망의 악순환을 끊는 연습이다.
좋은 것이 나쁜 것을 몰아내도록 방치해두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것을 제때 비워
‘양화’가 머물 자리를 마련하는 일.
그것이 삶의 지혜이다.
그렇게 해야만 냉장고도, 인간도,
부패 대신 신선함을 오래 간직할 수 있다.
나는 차가운 문을 닫으며 한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욕망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그 기한을 모른 척 쌓아두는 냉장고 인간은, 결국 스스로 부패의 냄새를 품고 살아가게 된다.

재심이 평소 버림의 중요성을 왜 그렇게 강조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녀는 버림으로써 잊는 것이 아니라, 버림으로써 ‘좋은 것’을 살려 두는 사람이었다.
남겨진 것은 결핍이 아니라,
신선함이 머물 수 있는 빈자리였다.
'양화'가 머물 자리를 만드는 일,
그것이 내가 배워야 할 길이다.
나는 문득 묻는다.

나는 냉장고 인간인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