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희가 자신에게
현희에게,
그땐 너무 어렸다.
사랑받는 법도, 사랑하는 법도 몰랐던 시절.
그저 누구 탓이라도 붙잡지 않으면, 쓰러져버릴 것 같아 안간힘을 썼지.
그리고 결국, 그 탓이 가장 오랫동안 내 곁에 머무는 그림자가 되었어.
이제야 안다.
그 탓은 결국 내가 만든 집이었다는 걸.
돌로 벽을 세우고, 자책으로 지붕을 얹어 나는 그 안에 숨어 살았다.
거기에 너무 오래 지내다 보니
언젠가부터 그게 내 방 같았고,
그곳을 나오는 게 두려웠다는 것도.
괜찮아.
이제 문을 조금씩 열어볼게.
아직은 밝은 빛이 눈부시지만,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생각보다 따뜻하더라.
– 너로부터, 현희
팔연이 형 도연에게
형...
형이 나한테 했던 말, 맞는 말이었어.
근데 난 형이 말할 때마다 내 안에서 먼저 올라온 건 형에 대한 탓이었어.
형이 똑똑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늘 비교당해서 그런 건지, 이유를 따지면 끝이 없겠지.
근데 이제 이런 생각도 들어.
형이 그렇게 말이 많았던 건,
말로라도 내게 닿고 싶었던 건 아닐까 하고.
그래서 나도 말해볼게. 그동안 형한테 많이 서운했어.
이 말 하나 꺼내는 데 40년이 걸렸네.
– 팔연
도연이 팔연에게
팔연아,
네가 그 말 해줘서 고맙다.
내가 던진 말들이 네게 상처였다는 걸, 솔직히 몰랐던 건 아니야.
하지만 그걸 인정하면 내가 무너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침묵했지.
넌 침묵으로 숨었고, 난 말로 숨었어.
우린 다른 길을 탔지만, 결국 같은 곳에 있었구나.
숨는 것도 이젠 지쳤다.
우리, 이쯤에서 같이 나와 보자.
정원 벤치에서 언제 한 번 소주 한 잔 하자.
– 도연
재심이 친구들 모두에게
현희, 팔연, 도연에게,
고마워요.
여러분들과 정원을 가꾸면서
말은 많이 안 했지만 마음은 참 많이 정리됐어요.
사람이 스스로를 탓할 땐 그 감정을 들여다볼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근데 혼자서는 그게 잘 안 되더군요.
여러분이 옆에 있어서 내 안을 조금씩 바라볼 수 있었어요.
잡초는 뽑는 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누군가 함께 봐주는 것,
그게 제일 큰 위로더라고요.
오늘도 같이 정원에 와줘서 고맙고요,
다음에도 또 와줬으면 좋겠습니다.
– 재심
어느 익명의 독자가, 책 속의 인물들에게
현희, 팔연, 도연, 재심에게,
여러분의 이야기 속에서 제 모습이 자꾸 보여요.
‘탓’이라는 말을 이렇게 천천히 들여다본 건 처음이에요.
저는 지금까지 누군가를 탓하느라 나 자신을 너무 미뤄둔 것 같아요.
이 책을 덮고 나면, 저도 오늘 한 번 정원 흙을 손으로 만져보려 해요.
잡초가 무성하겠죠.
그래도…
어쩌면 그 속에 꽃씨도 숨어 있을지 모르니까요.
고맙습니다.
– 아직은 조용한 누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