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없는 세상이란 불가능한 건지도
미국은 일찌감치 백신 접종이 시작된 터라 미국에 있는 내 친구들도 대부분 접종을 마친 상태다. 그런데 며칠 전 수업시간에 시작하기 몇 분 전 학생들이 백신 접종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것(난 오늘 오후에 2차 접종받으러 간다, 넌 받았냐, 어땠냐 팔이 정말 그렇게 아프냐 등)을 가만히 듣던 교수님이 '백신 접종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새로운 차별을 불러올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는 공지가 학교 당국으로부터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예? 왜요? 미국애들조차 황당해서 이유를 물으니 접종을 받는 사람도 건강을 염려해서이지만 받지 않는 사람도 혹시 모를 부작용이 걱정돼 건강을 염려하는 이유에서 받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행여 이로 인해 낙인이 찍힐까 염려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조교인 우리들은 그런 이메일을 받지 못한 것을 보면 아마 교수진들에게만 따로 메일이 돈 건가 싶긴 한데, 당시만 해도 참 개개인의 인권이 중요한 미국이라지만 별 걸 다 차별이라 하네 속으로 피식 웃었다.
교수님의 염려를 실감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지나지 않은 다른 수업에서였다. 우리 학교를 비롯한 미국 학교들은 대부분 이번 주나 다음 주중으로 종강을 하는데, 그날은 그 수업의 마지막 날이었다. 같이 수업을 듣던 아이 한 명과 수업을 마치고 한 학기 동안 고생했다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 학기에는 여기 올 거냐'는 질문을 받았고 '갈 예정'이라 답하니 잘 됐다면서 네가 여기 오면 우리 같이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훈훈한 대화가 오가던 중이었다.
"내가 여기서 자주 어울리는 애들이 있거든. 그 애들이랑 종종 맛집에 가는데, 너도 그때 같이 끼면 좋겠다."
"오 좋은데? 그래, 그러자!"
"응! 아 맞다, 근데 너 백신 맞았어? 한국은 지금 상황이 어때?"
"아, 한국은 아직 우리 연령대는 맞을 수 없어. 특정 위험 직업군에 속하거나 65세 이상인 사람들만 맞을 수 있거든. 7월 초부터는 19세 이상 일반 성인도 맞을 수 있다고 하니까 난 그때쯤 맞을 수 있을 것 같아. 아니면 그냥 8월에 개강하기 전에 좀 일찍 미국에 가서 맞을까도 생각 중이야. 거기서는 어떤 백신으로 맞을지 내가 선택할 수 있으니까."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그 애의 얼굴에 잠시 난감해하는 표정이 스쳤던 건 나만의 착각인가 싶은 순간, "아 그래? 그러면.... 하하, 너도 잘 알겠지만 백신을 맞은 사람들끼리는 백신 버블이 형성되잖아? 백신을 맞지 않은 사람이 거기 끼면.... 하하, 너도 무슨 얘기인지 알지?"
진심으로 순간 난 무슨 이야기인지 못 알아들었다. 영어를 못 알아들어서가 아니라, 그런 내용이 등장할 거라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아마 한국말로 이야기했어도 나는 무슨 맥락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애가 좀 난감해하면서 얼버무리며 말을 하기에 나도 얼결에 그냥 하하 따라 웃고 대충 그래 그럼 담 학기에 미국에서 만나자~ 하고 줌을 껐는데, 끄고 나서 곰곰 생각해보니 곱씹을수록 기분이 싸한 것이 불쾌한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라, 이 쎄한 기분을 보니 지금 뭔가 내가 나쁜 일을 겪은 것 같은데 내 직감이 말해주었다.
백신 버블이 무슨 상관이지? 난 한국에서 7월에 맞든 8월에 미국 가서 맞든 어쨌든 백신 맞긴 할 건데 그게 무슨.... 아아. 너 지금 내가 혹시라도 어디서 코로나 걸려와서 너의 그 친한 무리들에게 퍼뜨릴까 염려가 된 거구나! 교수님이 말씀하신 새로운 종류의 차별이라는 게 이런 경우를 말씀하신 거였구나 싶으면서 굉장히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코로나 백신 접종을 한다 해도 완전히 100% 예방은 불가능하다는데, 게다가 막말로 미국에서 아무리 백신 맞고 어쩌고 해도 한국만큼 철저한 방역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에, 굳이(!) 비교를 한다면 백신 맞았어도 미국에 있는 너희보다 백신 안 맞고 한국에서 지내는 내가 감염될 확률은 훨씬 낮아 보이는데! 게다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개인 자유이니 뭐라 할 수 없지만 굳이 그걸 입 밖에 낸 그 경솔함도 어이가 없었다.
코로나로 인해 아시안에 대한 증오범죄와 차별이 그 어느 때보다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이 시점에, 코로나 백신 맞았냐 안 맞았냐로 차별을 할 여지를 만들어내는 그 창의성에 난 또 한 번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문득 작년 이맘때 미국에서 코스트코에 갔다가 백인 중년 여성에게 차별을 당했던 기억도 떠오르면서, 인간은 정말이지 차별이라는 것을 하도록 태초부터 그렇게 지어짐 받은 존재인 건가 싶기도 했다. 차별할 거리를 어떻게든 찾아내서 나는 너와 다름을 드러내는 것. 거기서 오는 우월감 내지는 자기 존재의 확인이 이유일까? 아이러니지만 내게 인종차별을 했던 그 여자가 내게 처음 말을 걸며 했던 이야기는 홀로코스트에서 자신의 가족이 겪었던 비극적인 개인사였다. 그 누구보다 차별로 인한 억울한 죽음과 슬픔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코스트코에서 우연히 샴푸 진열대에서 마주친 작은 아시안에게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했던 것이다("학생이 살펴보고 있는 그 샴푸는 동양인에게는 잘 맞지 않아요. 그 샴푸는 백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샴푸거든요").
인간이 사회적인 존재인 것은 그래서 비극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차별을 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는 존재인가? 이런 일들을 겪을 때면 나는 지독한 염세주의자가 된다. 하여간 못된 사람들 너무 많다. 샴푸 발언을 내게 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그 중년 백인 여자는 자신이 굉장히 우아하고 지성인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었다. 차별을 하는 사람들은 정작 자신이 하는 것이 차별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혹시 나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렇게 차별을 한 적은 없었을까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