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annie Jul 22. 2022

또 왔다, 슬럼프

내가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사람 같이 느껴질 때

지난 5월, 기말을 앞두고 지도교수님과 면담을 할 때만 해도 올여름방학에는 그냥 한국에 가지 말고 논문 작업에 열중할까 고민했었다. 미국에서 보냈던 학기 중에는 늘 새벽 5시 반이면 기상해서 30분 정도 묵상을 하고, 그다음에 30분 정도 조깅을 하고 7시에 아침식사를 한 후 8시에 오픈하는 카페에 문 여는 시간 맞춰서 가서는 점심 식사 전까지 공부를 하다 오곤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내 연구실로 가서 오후 내내 공부했다.


루틴대로 사는 것이 슬럼프 예방 차원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여름방학이 거의 끝날 무렵인 이제야 나는 깨닫는다. 한국에 오니 아무래도 내 집이라 그런지, 그리고 학기 내내 너무 열심히 달린 탓인지, 한동안 책을 전혀 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운전면허까지 딴답시고 첫 한 달은 어영부영 보내고 나니, 학기 내내 잘 지켜왔던 루틴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일까. 결국 그분(=슬럼프)이 오셨다.




다른 친구들은 나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는데도 슬럼프 없이 잘만 지내던데, 나는 이 정도 달린 것만으로도 슬럼프가 오다니, 천성이 게으른 사람인 걸까? 이 슬럼프가 내 박사 과정 동안 처음인 건 아니다. 그렇기에 슬럼프가 올 때마다 '또 왔구나'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거기서 빠져나오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슬럼프는 매번 어렵고, 절망스럽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나는 슬럼프가 찾아올 때면 제일 먼저 무기력증에 빠진다. 정말 손끝 하나 까닥하고 싶지 않아 침대에 가만히 누워만 있다. 어디서 읽으니 이건 우울증의 증상이라고도 하던데, 나는 우울'증'까지는 아니지만 슬럼프가 찾아올 때면 우울'감’ 정도를 겪는 것 같기는 하다. 정말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시체처럼 누워서 핸드폰만 들여다보거나, 잠만 잔다.


슬럼프가 시작되는 계기는 저마다 다른데 대개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에 의해서 시작될 때가 많은 것 같다. 일종의 트리거trigger가 되는 셈이다. 루틴대로 사느라 잠시 잊고 있던 내 안의 불안과 염려에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화르륵 불타오른다. 이번 슬럼프는 한국 지도교수님과 오랜만에 나눈 대화가 그 계기가 되었다. 내가 현재 진행하고 있는 연구에 대해 들으신 교수님께서 '근데 그 연구가 과연 철학이 있다고 할 수 있냐'는 질문을 던지셨던 것이다. 내가 그저 방법론에 몰두한 나머지, 그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철학이 부재한 것 같다고, 그러면 나중에 심사defense에 가서도 제대로 답변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고, 교수님 딴에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조언을 해주신 것인데, 유리멘탈에 개복치 중 개복치인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만 하늘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만 것이다.


'큰일 났다, 이를 어쩌지?'


나는 지엽적인 사람인 것 같다. 나무(라 쓰고 디테일이라 읽는다)는 기가 막히게 잘 보는데 숲은 잘 보지 못한다.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그래 그 부분이 논문 어디에 언급되었지?' 질문하시면 페이지까지 기억하는 나다. 그렇지만 큰 그림은 놓칠 때가 많다.




처음엔 그저 선행연구 중 그 방법론을 쓴 논문이 재미있어 시작한 연구였다. 내가 보기에 약점으로 보이는 부분을 조금 수정해서 실험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 기저에 깔린 연구 질문 research question이나 철학까지는 사실 아주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와 되돌리기엔 나는 너무 많은 것을 해왔다.


"박사 과정은 많은 사람들의 주장과 이론을 읽고, 그중에서 네가 지지하는 입장을 정하는 거야. 그냥 다른 논문 살펴보고 정리하고 되풀이하는 건 석사 때나 하는 거지." 이어지는 교수님의 말씀을 듣는데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석사 때 내가 늘 말했던 게 그거였는데, 까먹은 거니?"


그러게요 교수님, 저는 그동안 뭐했을까요. 공부를 안 했던 건 아닌데.... 미국 지도교수님께서도 '그러다 번아웃 오면 어떡하냐'고 걱정하실 정도로 열심이었던 저인데.... 열심히 앞으로 달리기만 했는데 방향이 맞는지는 미처 몰랐었나 봐요.... 그리고 이어지는 내 안의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의 향연.


- 난 역시 머리가 좋지 않구나....

- 난 역시 이걸 전공할 사람이 아니구나.

- 이 주제는 내가 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주제였구나.

- 아 역시 난 교수는 못되겠다.

- 연구자가 되긴 글렀다.....


온갖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생각들이 헬륨가스 풍선처럼 부풀어올라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게 느껴졌다. 완벽주의자인 나는 뭔가를 할 때 제대로 될 것 같지 않으면 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쉽게 들곤 한다. 이대로 해봤자 잘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모든 걸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대학원생도 이럴까? 최근에 만났던 선배 한 명은 내게 '다들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여도 막상 속을 들여다보면 고민도 많고 갈등도 많으니 힘들다고 그게 나 혼자라고 절망하지 말라'는 조언을 해주셨었다. 그 선배 말처럼, 다른 박사 과정생들도 나처럼 좌절하고 낙심할까? 혹 그렇다 해도 그 좌절이 '이 바닥에서 살아남기는 힘들겠다'는 수준의 좌절일까? 모르겠다.


이틀 내내 초우울 모드로 무기력하게 있다가, 그래도 학교에서 너 멍청하니 다 관두고 나가라고 한 것도 아닌데 끝까지 버티자는 마음으로, 힘없이 일어나 논문을 편다. 읽자. 정리하자. 실험 자료를 다듬자. 오늘 할 일을 하자. 내일 할 일은 내일의 내가 할 테니. 졸업 후에 먹고 살 걱정일랑 졸업 후의 나에게 맡기자. 윤여정 선생님의 명언을 기억하면서.... '나도 60살은 처음이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나도 이렇게 안 살았지!'

매거진의 이전글 연구자의 조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