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하기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이번 여름 방학에는 같은 학과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친구 두 명과 함께 재미있는 일을 하나 하고 있다. 학부생 대상 개론 과목 하나를 강의 기획부터 실제 커리큘럼 구성까지 새롭게 디자인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이 일을 하게 되기까지는 조금 긴 사연이 있다. 우리 같은 박사 과정생들은 대부분 졸업 이후 교수가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에 학과에서는 최소 한 학기 이상 모든 박사 과정생들에게 학부생 대상 개론 과목을 강의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래야 이력서에 이런 강의를 맡은 적 있다고 한 줄 써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한국보다는 미국에서 강의 경력을 상대적으로 더 중요시한다). 매 학기 말이면 수강생 강의평가를 놓고 학과 내 모든 교수님들이 둘러앉아 읽는다고도 들었다. 그 평가를 대상으로 다음 학기에 강의를 맡게 될 대학원생들이 결정된다.
강의를 맡게 되는 시기는 개인마다 다른데, 일단 어느 정도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이 쌓이고 (=졸업 필수 개론 과목을 모두 들은 상태여야 하고) 졸업 요건인 본인의 졸업 논문도 어느 정도 진척이 있는 사람들이 우선순위에 오른다. 개론 과목을 다 듣지 못해서 아는 게 없거나, 들었다 해도 잘 못 해서 학점이 좋지 않거나, 자기 논문 연구도 잘 해내지 못하는 학생에게 덥석 강의를 맡겼다가는 그 강의를 들을 수강생들도, 강의를 할 박사생 본인도 고통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난 사실 '때가 되면 알아서 학과에서 맡기겠지' 싶어 별생각 없었고, 다행히도 너무 늦지 않게 적절한 시기에 강의를 맡게 되어 이 일로 스트레스를 받은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어떤 이들에게는 생각보다 아주 중요한 이슈인 모양이다. 하긴 동기들은 다 강의 맡는데 나만 강의를 안 맡겨 준다거나, 남들은 수 차례 강의를 맡는데 나는 한 번만 맡기고 다시는 안 맡긴다면 내 강의력(내지는 대학원생으로서의 실력)에 대해 학과에서 의구심을 표한다는 뜻일 수도 있으니 (물론 다른 이유 때문인 경우도 있다) 조금 신경이 쓰일 수 있을 것도 같다.
여하튼 현재 같이 강의를 디자인하고 있는 친구들 중 한 명이 오래도록 강의를 맡고 싶어 했지만 학과에서는 맡겨주지 않았고, 마음이 급했던 친구는 학과 내 개설 가능 과목 리스트를 살펴보고 그중 자신이 맡을 수 있을 만한 과목 하나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 수업이 마지막으로 개설되었던 건 무려 15년 전이었고 개설 가능 과목 리스트에는 있기는 하나 사실상 폐지된 거나 다름없는 상태라 교수님도 난색을 표하셨는데, '그렇다면 내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이 과목을 디자인해보겠으니 보시고 괜찮다면 이 과목이 다시 개설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라고 당돌한 요구를 한 것이다.
그런 사연으로, 우리는 방학이 시작된 이래 매주 만나 (현재 셋 다 다른 나라에 있기 때문에 줌으로 미팅을 한다) 강의를 디자인하는 중이었다. 나야 이미 강의 하나를 맡아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일에 반드시 참여해야만 할 간절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같이 작업할 두 명 모두 나와 친한 사이이고, 또 나중에 이력서에 넣기에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되어 '같이 해보자'는 친구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15년 전이면 강산이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다. 강의계획서조차 남아 있지 않은 과목이다 보니 정말 말 그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작업이었다. 우리는 맨 처음 강의 목표를 말로 표현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교재를 고르고, 주차별 강의 계획서를 작성했다. 강의 개설과 디자인에 관한 캠퍼스 내 워크숍도 들었다. 사정이 있어 못 들은 친구를 위해서는 서로 참석해 필기를 공유했다.
사실 제안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나는 그 친구의 적극성과 대담함에 굉장히 놀랐다. 나라면 '내가 아직 부족해서 강의를 안 맡기나 보다' 생각하고 주눅이 들었으면 들었지 은근과 끈기로 개설 가능한 과목 리스트를 뒤져 새롭게 디자인할 생각은 절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니 자신이 기회를 발굴해냈고, 제안에 대해 교수가 의구심을 가지자 당돌하게 '일단 해보겠으니 보시고 나서 판단하라'며 제안한 것이다. 그 용기와 자신감이 부러웠다.
대다수의 동양인 유학생들이 그러하듯 나는 미국인 유학생들에 비해 적극성이 부족한 편이다. 일단 교수님에게 뭔가를 제안하는 것도 내게는 아주 큰 용기를 요할뿐더러, 어렵사리 제안한 것에 대해 교수님이 반문하거나 의문을 표하실 때면 쉽게 주눅이 들어 포기하곤 했다. 유학생에게 자기 PR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미 이전 포스트에서도 이야기한 바 있는데, 머리로는 알면서도 나는 이게 참 어렵다.
여기에는 일단 나 스스로의 실력에 대해 자신감이 부족한 탓도 있지만, 그것만큼이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내 성향도 한몫을 한다. 교수님들은 매우 바쁘시기 때문에 대개 어떤 제안이나 요구를 하고 나서 단 번에 답을 받아내기는 쉽지 않다. 몇 번이나 재촉을 해서 답을 받아내고 진도를 빼야 하는데, 내게는 이게 마치 생각 없는 교수님을 괴롭히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많아야 두 어 번 재촉을 하고(이것도 엄청난 용기를 요한다) 그 후에도 답이 없으면 '교수님은 생각이 없으신가 보다, 나랑 같이 연구하고 싶지 않으신가 보다' 지레짐작하고 접은 순간이 적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교수님이 제안을 수락해 공동 연구를 하게 된 친구들은 열 번, 많게는 스무 번까지 재촉을 해서 답을 받아낸 것이었고, 오늘 줌 미팅에는 교수님까지 합석해서 넷이서 대화를 했는데 미팅 분위기를 보니 교수님은 여전히 우리가 강의를 디자인하는 것을 그리 탐탁해하시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이 친구는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역시 이 정도로 적극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슬픈 마음이 들었다. 유학을 시작한 이래 이런 순간을 맞닥뜨릴 때마다 나를 괴롭히는 바로 그 생각. '아, 역시 난 안 되겠어..."
저는 이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아요
이 울적한 마음을 이후 점심에 만났던 친한 지인에게 이야기하니 지인이 왜 그런 생각을 하냐고 물었다. 글쎄, 꼭 대학원에 있는 동안이 아니더라도 졸업 이후에도 우리는 숱한 사람들 앞에서 내 연구를 선보이고 연구비를 타내기 위해 여러 기관에 제안서를 내야 하며 나와 의견을 달리 하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한다. 폐지 직전의 과목을 발굴해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지도교수에게 제안한 그 친구처럼, 넘치는 자신감과 거절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이, 연구자에게는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필수적인 자질이 내게는 없는 것 같았고, 그렇다면 나는 연구를 해서는 안 되는 사람 같다는 생각이 (유학 초반부터) 나를 시시각각 괴롭혔다.
이제부터는 이야기를 다 들은 지인이 내게 해 준 말이다. 아주 길고 갑작스러운 결론이지만, 언젠가 또다시 오늘과 같이 울적한 마음이 드는 날 열어볼 수 있도록, 지인의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꽤 오래전 일인데, 여느 때처럼 일하고 있는 나를 보고 지나가던 다른 동료 직원이 내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어. '과장님, 이 일이 재밌어요?' 그때 내가 뭔가 아주 신나고 재밌는 표정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평소와 다름없이 일하고 있었는데 그 직원이 그런 질문을 하길래 왜 그러지 싶었어.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러니까 최근에 있었던 일인데, 그날도 평상시처럼 그냥 별생각 없이 일하고 있는데 또 다른 직원이 날 보더니 묻는 거야. '차장님, 이 일이 재밌으세요?'
예? 제가요? 왜요? 반문했더니 그 직원이 하는 말이, 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라붙어서 어떻게든 해결해내는 걸 보면 즐기는 사람이 맞다는 거야. 그냥 적당히 하고 끝내고 싶을 법도 한데 최선을 다하는 걸 보면 이 일을 좋아하는 게 분명하대.
연구자가 되는 데 필요한 자질이 10개라면 모두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아주 드물 거야. 대부분 그중 최소 한 두 개는 부족하지 않을까?
아니, 그중 한 두 개만 가졌다 해도 그 일을 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해. 나는 정말 오랜 시간 이 일을 해왔지만 내가 하는 일을 즐긴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내게 있어 '즐긴다'는 것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아주 신나고 흥미로울 때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두 번이나 같은 질문을 받고 나니 이제는 왜 그 사람들이 그 질문을 했는지 알겠어. 그냥 꾸준히 이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내가 이 일을 즐긴다고 생각한 거야. 똑같은 상황에 주어져도 그냥 되는 대로 흘려보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더 좋은 결과물을 내려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잖아. 나는 내 일을 대단히 잘하는 건 아니지만, 만약 끝까지 남아있는 것이 '즐긴다'는 것의 정의라면, 그 동료들의 생각이 맞는 것 같아. 학사, 석사에 이어 박사까지 하고 있는 너는 이미 이 분야에 계속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걸 좋아하고 즐기는 거야.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 우리는 다 어딘가 부족하고 결핍이 있지. 네가 부러워한 그 동료들도 10개의 자질들을 다 갖고 있지는 않을 거야. 너에게 없는 걸 그들이 갖고 있듯, 그들에게 없지만 너에게만 있는 자질이 분명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는 협업을 해. 너희 셋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