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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Jun 30. 2022

난 내가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불특정 다수의 걱정인형들에게

여름방학이 어느새 절반 가까이 지났다. 길다고 생각했는데 하루하루 해야 할 일들을 하다 보니 말 그대로 '순삭'한 느낌이다. 이제 곧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전에 목표로 했던 일들을 다 완료하고 갈 수 있을지 이제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학기 중엔 새벽같이 일어나 할 일을 하던 나였는데, 방학이 되고 한국에 오고 나니 왜 이리 게을러지는지... 방학에도 학기 중과 똑같은 pace로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들은 진짜 대단한 사람들인 것 같다.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코로나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고, 나 또한 한국에 체류하는 기간 동안 할 일들을 하다 보니 여기 온 이래 그리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래도 간간히 시간이 될 때 소수의 지인들을 만났는데, 만나고 나서 보니 그중에는 다음번에 오면 만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이 사람은 왜 진작에 연락해서 만나지 않았나 생각이 드는 이들도 있었다.


전자는 아무래도 내 유학 생활에 회의감을 갖게 만드는 사람들이 해당한다. 그런 이들을 만날 때면 만나고 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든다. 대놓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이 나이 먹도록 유학생 신분이라는 것에 대해 의아해하거나 한심해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걷는 노선이 있으니까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몇 살 정도까지는 취직을 해야 하고 몇 살 정도에 결혼을 해야 하며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를 몇 살 즈음에 낳아야 한다. 몇 살 즈음에 첫 집을 장만해야 하고 몇 살 즈음에는 차도 이 정도는 끌어야 한다.


최근 몇 년간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을 생각하면 당장 없는 돈 있는 돈 다 끌어모아 집 한 채라도 사두어야 하건만, 아직도 스무 살 대학생 마냥 교수님 지도받으며 논문 한 편으로 밤새 골머리를 앓는 내 모습이 아무래도 철없어 보일 테다. 며칠 전에 갔던 병원 의사는 내 나이와 신분을 듣더니 돈은 누가 대주냐, 평일에는 뭘 하며 지내냐 등의 질문을 했다. 학비와 생활비는 학교에서 나오고(전액 장학금이니까) 주중에는 논문 작업을 한다고 했더니 '한국 같으면 결혼해서 아이 키울 나이인데' 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부모님은 별말씀 안 하시냐고 묻기에 '얘기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니 별말씀 안 하신다'라고 쿨한 척 대답했지만 속이 좋지 않았다. 나도 부모님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시선과 질문들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입학 허가서를 받아 들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나 졸업하고 나면 몇 살이지?'였다. 정작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에는 워낙 바쁘기도 하고 다들 나와 비슷한 대학원생들만 있기 때문인지 몰라도 이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 그런데 이번처럼 이렇게 한국에 잠깐 들어올 때면 그런 시선들이 느껴지고,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이 시선과 판단들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사실 내 미래는 내가 제일 많이 걱정한다. 그 병원 의사도, 그리고 지나가듯 내게 한 마디씩 하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내 미래를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다. 내가 당장 크게 아프거나 돈이 필요할 때 땡전 한 푼이라도 빌려주며 걱정해줄 사람들이 아니란 말이다. 걱정이라는 게 하면 할수록 끝이 없다. 우리는 마치 숨 쉬듯 걱정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지금 당장 내가 하고 있는 걱정이라면 '이번 여름방학이 끝나기 전에 실험을 마칠 수 있을까?', '다음 학기까지 소논문을 마칠 수 있을까?' 등이 있다. 좀 더 장기적인 걱정으로는 '졸업 후에 밥벌이는 하면서 살 수 있을까?', '날 교수로 채용할 대학교가 있을까' 등등이 있다. 난 비혼 주의자가 아니기에 결혼도 당연히 그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다. 걱정이 없을 땐 없는 대로 '왜 걱정이 없지?'하고 걱정을 한다.


그런데 걱정한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설령 모두가 우려한 대로 끝끝내 내가 타지에서 공부'나' 하느라 짝을 만나지 못해 평생 미혼으로 살아간다거나, 졸업 후에도 변변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밥벌이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해도... 이런 일들이 진짜로 벌어지기 전까지 미래를 비관하며 불행하게 살지, 아니면 나만의 착각이라 할지언정 찬란한 미래를 꿈꾸며 행복하게 살지는 내 선택이다. 쉽지 않지만 나는 후자를 택하고 싶다. 지난 브런치 글에서 자기 PR이 전부인 천조국에 대해서 썼던 것처럼, 사람은 나 잘난 맛에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야 이 무한경쟁 각박한 사회 속에서 조금이나마 행복(아니다, 덜 불행일까)하게 살 수 있다. 모두 '더 잘해야 한다'라고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라고 말하는 사회에서 나라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으면 사는 게 너무 버겁다.


나도 내가 철이 덜 든 것을 안다. 유학을 가보니 물리적인 나이만 성인일 뿐이지 정신적으로는 부모님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철부지였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내내 부모님과 같이 살았기 때문에 생존에 있어 기본적인 것들, 아파트 관리비를 낸다든지 식자재를 챙긴다든지 하는 일들을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한 적이 없었다. 미국에서 혼자 살게 되니 이전에는 부모님들이 해주셨던 것들을 내가 다 해야만 했다. 엄청난 난도를 요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은근히 자질구레하고 손이 많이 갔으며 공공 기관과 끝없는 연락이 필요한 일들도 더러 있었다. 이런 것들을 이제야 처음 해보다니... 게다가 이렇게 못할 줄이야... 자괴감을 느낀 적도 많았다. 내가 정말 부모님이라는 온실 속에서 편히 살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일들을 하나 둘 처리하는 동안 나 자신에 대해 더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한국에서는 사실 나에 대해 알 일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는 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사니까 이게 맞다고 생각했고 고민할 필요도 없었고 그러니 내 취향이나 장단점에 대해 사유할 필요도 없었다.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진로에 대해 불안할 일도 없었다.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갔고 졸업 후에는 직장에 다녔다.


그러다 유학을 왔더니 나 혼자 지내는 시간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그 시간 동안 들여다본 나 자신은 내가 생각했던 내가 아닌 경우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게 좋다고 하는데 난 그게 왜 좋은지 이해가 안 되는 경우도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별 관심 없어하는 게 내게는 유독 훌륭해 보이는 것도 있었다. 100명 중 99명이 좋다고 해도 1명이 싫다고 하면 발언권을 주는 미국 문화에서, 내 기호와 취향을 물어오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난 이게 왜 좋지?' 자문을 하다 보니 상당수는 '한국에선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해왔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여전히 철없는 소리나 지껄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한국 문화에서 나는 루저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나 자신을 기특하게 바라보고 싶다. 이번 여름에 내가 만났던 그 사람들의 예상대로 나는 결국 원했던 것들을 이루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지도 모르겠다. 이 나이 먹도록 유학 생활을 하면서 보란 듯 성취를 하지 못하고 끝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한 켠에는 그런 일들 대신, 누구도 상상하지도 못한 좋은 일들이 벌어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그래 이 나이까지 공부하고 있는 건 분명 많이 늦었지만, 틀린 것은 아니라고 나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최선을 다하고 나서 잘 안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최선을 다하는 나 자신을 너무 책망하지는 않으련다. 나는 지금 몸도 마음도 건강하고, 잘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꾸역꾸역 논문 작업을 해나가고 있고, 날 지지해주고 도와주는 교수님이 있고, 한주 잘 보내고 있냐며 연락해오는 친구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설령 이런 것들조차 사라진다 해도, 나는 나 자신을 기특하고 대견하게 여길 것이다. 무너지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 타인의 부정적인 판단과 시선에 상처받지 말고, 묵묵히, 하루를 살아내자. 그리고 언젠가 나와 똑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꼭 격려의 말을 건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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