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eannie Aug 13. 2022

너는 충분하단다

언제 들어도 좋은 응원의 마음

아직 개강까지 열흘 정도 남았지만 새 학기를 앞두고 이미 조금씩 분주해지기 시작한 이번 한 주. 내가 막 하와이로 돌아왔던 7월 말만 해도 굉장히 한적했는데 8월에 돌입하면서 서서히 학생들도 캠퍼스로 돌아오기 시작해서 그런지 이번 주는 거의 학기 중과 별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북적이는 한 주였다. 바야흐로, 새 학기다.


이번 주는 내게 있어 꽤 중요한 일들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운전을 했다는 것이다. 평생 한국에서 뚜벅이로 살면서 면허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나. 미국에 와서야 그 필요성을 절감했고 그 덕분에 여름방학 동안 필사적으로 공부해서 3주 만에 면허를 땄다. 아무래도 한국에서 좀 오래 차를 몰다가 미국에 왔으면 좋았겠지만 면허 따고 나니 남은 방학 기간이 워낙 짧기도 했고, 내가 다른 학생들보다 좀 더 일찍 미국으로 돌아오는 바람에 한국에서 도로연수 마치고 정말 혼자서 차를 몰고 다닌 것은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번 주 월요일에 드라이빙 스쿨 선생님으로부터 90분간 도로 연수를 받고, 금요일이었던 오늘은 친구들과 함께 차량을 렌트해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바닷가에 다녀왔다.


아직 와이키키 시내와 같이 북적거리는 곳은 조금 무섭지만 캠퍼스 주변만 와도 훨씬 한적해서 그런지 다닐 만한 것 같다. 아직은 교차로에서 좌회전하는 게 조금 어려운데(미국은 비보호 좌회전이 많고, 그중에서도 하와이는 비보호 좌회전 시 나름의 규칙이 있어 초보는 여간 쉽지 않다), 그래도 오늘 탄 72번 국도는 제법 탈 만 했다. 친구들도 내가 너무 겁을 내니까 초반엔 말도 한마디 안 할 정도로 긴장한 티가 역력하더니, 몇 분 지나고 내가 제법 안정감 있게 운전하는 것 같으니 음악도 틀고 자기들끼리 수다도 떨었다. 애들이 한 마디도 안 할 때는 '괜히 내가 운전한다고 했나' 싶어 맘이 불편했는데 이내 긴장을 풀고 자기들끼리 떠드는 모습을 보니 나도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운전할 수 있었다.


하와이야 워낙에 유명한 관광지다 보니 렌터카 업체가 많지만 우리는 HUI ('공유'라는 뜻의 하와이어. 발음은 '후이'를 약간 빨리 말한다고 생각하면 된다)라고 해서 도요타Toyota에서 운영하는 공유차량 서비스를 이용했다. 우리나라의 쏘카 같은 것인데, 캠퍼스 주변에는 이용 가능한 지점이 두 개가 있다. 와이키키 같이 수요가 높은 곳에는 훨씬 더 지점도 주위에 많고 이용 가능한 차량 종류도 다양하다. 어플로 미리 예약해서 정해진 시간에 이용한 다음 동일한 장소에 반납하는 시스템인데 차량 예약 시 지불하는 금액에 주유비와 보험비까지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아주 편리하다. 한국에서 쏘카를 이용해본 사람은 아마 무리 없이 이용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 운전 연습할 때는 후방카메라로 보면서 주차했기 때문에 혹시라도 차량이 너무 낡아서 후방카메라가 없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웬걸, 도요타의 주요 모델들이 쫙 있어서 원하는 모델로 골라서 탈 수 있었고 차량 상태도 내가 한국 운전학원에서 탔던 차에 비하면 너무나 우수했다.


 단위로 대여하면 비싸지만(하루 125), 시간 단위로 대여하면 아주 괜찮은 가격대인  같다. SUV 차량으로 6시간 대여하고 60 정도 나왔으니 말이다. 학생증을 보여주면 오아후 시내버스가 공짜이기 때문에 가까운 거리는 버스를 이용하는 편이 당연히 낫지만, 오늘 다녀온 바닷가처럼 버스로 다녀오기 애매한 곳은(버스로 갔으면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HUI 다녀오면 괜찮은  같다. 앞으로 종종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와이는 널린 게 바다이다 보니 정작 현지인들은 와이키키에 잘 가지 않는 편이다


두 번째로 중요했던 일은 마침내! 두 번째 소논문의 실험 방법을 확정 지었다는 것이다. 방학 내내 실험 방법을 짜느라 골머리를 앓았는데 마침내 교수님과 미팅을 하고 3시간 동안 쉬는 시간 없는 마라톤 논의를 한 끝에(사실 거의 교수님이 일방적으로 이야기했지만 ㅎㅎ) 일단락 지었다. 이제 개강하자마자 매주 금요일에 있는 학과 세미나에서 다른 교수님들과 학생들 앞에서 발표를 하고, 피드백을 받아서 수정을 하고 나면 본격적으로 소프트웨어를 이용해 실험을 짜서 본격적인 절차에 돌입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연구가 바탕으로 하고 있는 연구들 중 두 편의 저자가 바로 그 세미나에 참석하시기 때문에, 정말 중요한 피드백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교수님은 나이가 꽤 있는 편이신데도 장시간 회의나 수업에 강하시다. 사실 그냥 말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분 같기도 하다. 예를 들어 A 실험 방법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으면 그 A 방법이 최초로 누가 만들어서 어떻게 발전되었고 무슨 장단점이 있는지, 거의 개론 수업 강의처럼 샅샅이 설명해주신다. 그래서 무슨 질문을 해도 최소 30분은 답변을 듣겠다는 각오를 하고 던져야 한다. 미국 애들은 지친다며 싫어하던데, 난 누가 날 위해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주겠나 싶어서 재미있게 듣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언젠가는 5시간 회의한 적도 있는데 막판 1시간은 좀 힘들었지만 앞의 4시간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었다. 이 세상에 누가 날 위해 그렇게 열심히 강의를 해주겠는가. 생각해보면 세계적인 석학으로부터  1대1 과외를 받는 셈이다.


실험 방법론을 확정한 것도 기쁘지만 실험 참가자군을 변경하겠다고 내 의견을 피력한 날이기도 했는데, 교수님이 워낙 이전 참가자군 구성을 마음에 들어 하셨기 때문에 바꾼다고 하면 좀 언짢아하실까 봐 걱정했었다. 그래서 미리 사전에 파일럿도 간단히 해보고 나서 결과를 보여드리면서 설명했는데 의외로 흔쾌히 동의하셨다. 오히려 교수님이 언짢아하신 부분은 파일럿 방법이었는데, 내 입장에서는 아직 이렇게 바꿔도 괜찮을지 감만 잡자는 생각으로 돌린 파일럿이니 대충 간단하게 짜서 한 것이었는데, 교수님이 보기에는 그래도 너무 허술해 보였던 모양이다. 바꾸려는 건 좋은데 앞으로는 파일럿 그렇게 돌리면 안 된다고 일장연설을 듣고 나서야 다음 주제로 넘어갈 수 있었다. 어쨌든 내 의견대로 되었으니 기쁘게 생각하자....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오래, 그리고 힘든 시간을 거쳐야 했다. '제가 이 연구를 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한 사람 같지 않아서 괴로웠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교수님 왈 '이건 나도 완전히 이해하는데 며칠이 걸릴 정도로 어려운 주제다, 그러니 나보다 훨씬 짧은 시간 동안 이걸 공부한 너로서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하셨다.


"너는 이 연구를 하기에 충분히 똑똑해. '내가 이 연구를 하기에 부족한 사람 같다'는 생각은 버려. 그런 생각이 현실이 되게끔 놔두지 마. 네가 똑똑하지 않아서 이 연구를 할 만해 보이지 않았다면 애초에 네가 이거 같이 연구하자고 했을 때 내가 승낙하지도 않았을 거야. 난 아무 학생이나 연구 제안받아주지 않아. 그리고 중요한 건 네가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 포기하지 않고 이 연구를 계속해주어서 고맙다."


"저도 예전엔 그랬어요 교수님. 하다가 어려우면 관뒀어요. 그런데 이번엔 그만두고 싶지 않았어요."


"그만두는 사람들 많아. 어떤 사람들은 매일 그만둬. 나도 자주 그만둬. 끝까지 밀고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모두 힘들어해(everyone struggles). 평생 이 분야에 몸 담은 나조차도 힘들어한단다. 그렇지만 힘들다는 건 뭔가를 배우고 있다는 증거야. 결국 네가 방학 내내 짰던 방법론은 쓰지 않는 쪽으로 결정했지만 적어도 이제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알게 되었잖아?"


방학 내내 마음고생을 해서 그런지 마지막 말씀을 듣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곳에 와서야 나는 진정한 어른이 되어 간다. 어른이 된다는 건 물리적 나이와는 하등 상관없다는 것도 배워 간다. 어려울 것을 알지만, 해봤자 잘 안될 것 같고 어찌어찌해서 다 끝나도 아무것도 될 것 같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밀고 나가는 끈기를 배운다. 그렇게 하기까지 무한히 나를 신뢰해주고 지지해주는 벗들을 통해 협력과 공존의 가치를 배운다. 배울 점이 가득한 사람들 틈에 둘러싸여,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는 세상과 사람에 대해 오늘도 조금 더 이해에 깊이를 더해가며, 나는 오늘도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