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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Aug 18. 2022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개강 직전의 기록

어제부터 이번 주말까지는 학부 신입생들이 기숙사에 들어오는 기간이다. 학교에서는 어제 아침에 전체 공지 이메일을 보내서는 '오늘부터 나흘간 신입생들의 짐을 실은 차량들이 많이 들어올 예정이므로 캠퍼스가 많이 혼잡할 것'이라며, '이 기간 동안은 원래 허용된 주차 공간 외에도 다른 곳에도 주차를 허용하겠다'는 공지를 했다(평상시에는 미리 발급받은 주차권으로 지정된 공간에만 주차가 가능하다).


지난 학기 말 졸업식 시즌에도 자녀의 졸업식을 보기 위해 곳곳에서 몰려든 차량으로 인해 학교 내 주차장은 물론이고 캠퍼스 부근에 위치한 외부 주차장까지 만차가 될 정도였던 걸 떠올리니 그 공지 메일의 내용이 바로 이해가 되었다. 역시나 학교 공지 메일이 뜨기 무섭게 이른 아침부터 캠퍼스가 부산해지기 시작함을 느낄 수 있었다. 캠퍼스를 걸으며 둘러보니 자기 몸보다 큰 대형 TV를 이고 나르는 학생도 있었고 온 가족이 대형 차량을 타고 와서 짐을 하나씩 옮기는 풍경도 보였다. 그 집에 막둥이가 입학해서 온 식구들이 총출동한 걸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다.




10년 전 프랑스를 여행한 적이 있다. 파리 in-out으로 2주 정도 여행했었는데, 고속열차를 타고 아래 지방부터 훑으며 올라오는 일정이었다. 10년이나 지난 만큼 모든 일정의 매 순간이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중에서 특히 내 기억 속에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장면이 하나 있는데, 바로 리옹(?이었던 것 같다. 혹은 니스였던가)에서 출발을 기다리며 기차 안에 앉아 바라보았던 풍경이 그것이다.


아주 어려 보이는 소녀가 어디론가 혼자서 먼 길을 떠나는지 꽤 큰 짐 가방을 들고 부모님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었는데, 딸내미를 혼자 보내는 것이 영 마음에 걸리는지 기차 출발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세 식구는 한참을 끌어안고 대화를 나누었다. 딸내미의 머리카락을 몇 번이고 어루만지던 엄마의 손길, 애틋하게 바라보던 아빠의 눈빛, 그리고 끝내 출발이 목전에 다다르자 몇 번이고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던 소녀의 모습까지, '국적과 언어가 달라도 가족과 떨어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짠했던 그날의 기억. 동생과 함께 했던 여행이었기에 사실 그 전까지는 여행 중 그다지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던 나였건만, 그 순간만큼은 '부모님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프랑스에 가면 누구나 한 번쯤 지나는 개선문도 가고 샹젤리제 거리도 거닐고, 숱하게 아름다운 풍경들을 보았지만 유난히 그날의 그 장면이 머릿속에 콕 박혔던 것을 보면 나도 참 가족의 사랑을 어지간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 모양이다.




그리고 어제 아침에 학부생 기숙사로 밀려드는 차량들의 행렬, 그리고 그 차량마다 쏟아지는 짐들, 그 짐들을 하나라도 더 들어 옮겨주려고 동행한 부모들의 모습을 보면서 바로 그날 보았던 프랑스 기차역에서의 그 소녀가 떠올랐다.


공부라는 것이 제 아무리 대단한 선생을 붙여주어도 결국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은 학생 스스로 해야 하는 일이기에, 박사 과정은 항상 외로움을 수반한다.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연구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외로움을 숙명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보통 아주 중요하고 분초를 다투는 작업이라 극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경우가 아니고서는 웬만해서는 친구들과 늘 함께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 편인데, 그렇게라도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하면 외로운 이 일들이 조금은 더 나아지기 때문이다. 다들 연구로 바쁘기 때문에 '같이 놀자'라고 하면 모일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지만 '같이 공부하자'라고 하면 언제든 함께할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 단골 카페에서, 혹은 학과 내 세미나실에서, 마음이 맞는 짝꿍들과 둘러앉아 각자의 공부를 하고 주전부리도 나눠 먹다 보면 지난하고 외로운 이 길이 조금은 할 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연구와 달리 이 산책로는 조금만 걸어도 금방 끝이 보인다(ㅎㅎㅎ).




최근에 만났던 누군가 내게 '그 나이에 타국에서 공부하기로 결정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힘들지 않냐'라고 물었다. 요새는 교수되기도 쉽지 않은데 졸업하고 나서 생계가 걱정되지 않냐고, 자기도 그래서 계속 공부하고 싶었지만 먹고사는 게 걱정되어 그냥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결론은 언제나처럼 똑같았다.


나는 맞는 속도로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남들이 보기에는 많이 느려 보일 수도 있지만 상관없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칠 때 살아있어 행복하다는 생각을 한다. 연구는 답이 하나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쉽지 않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다. 논문을 쓸 때는 마치 소설가가 된 느낌이 든다. 이 주제를 어떤 식으로 풀어낼지, 선행연구들을 어떻게 연결시켜서 내 연구주제로 이어지게 할지 씨줄과 낱줄을 엮는 작업을 할 때면 주요 캐릭터들을 두고 어떻게 플롯을 짤지 머리를 쥐어짜는 소설가들의 심정이 이해가 된다.


즐겁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노력하지 않아도 열심히 하게 된다. 나도 모르는 새 파고 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졸업 후에 내가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처럼 하다 보면 결과도 괜찮지 않을까? 혹 나쁘다 해도 내 인생의 지금 이 시기가 행복하니까 미리 불행을 예견하며 비통해하지는 않을 테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행운아인지도 모르겠다. 지상낙원이라는 곳에서 좋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하고픈 일들을 마음껏 하고 있으니 말이다. 졸업 후의 일들은 졸업 후의 나에게 미뤄두련다. 박사 과정 입학 전의 내가 했던 걱정들 중 상당수는 입학 후의 내가 보니 쓸모없는 걱정들이었다(코로나가 터져서 2년 넘는 시간 동안 온라인으로 수업할 줄을 전 세계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리고 미리 알고 있었어도 별 방법도 없는 것들이 많았다(e.g., 가서 친구 어떻게 사귀지? 영어 금방 안 늘면 어쩌지?). 다만 주어진 이 시간을 최대한 소중하게 아껴 쓰기로 한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새롭게 내 앞에 주어진 오늘 하루가 너무 소중하고 귀해서, 조금이라도 더 음미하면서 보내야만 하겠다.


그리고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면서 보내려 한다. 가족까지는 아니지만 가족처럼 나를 생각하고 아껴주는 친구들, 교수님들, 오가며 우연히 만나게 되는 신기한 인연들까지. 어제는 하와이에서 가장 역사 깊은 한글학교의 한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가 한국에서 같은 대학을 나온 동문 지간임을 알게 되었다. 나보다 까마득한 선배님이셨지만 세상에 한국에서 만나도 신기한데 바다 건너 그것도 이 하와이 땅에서 만나게 되다니, 신기하고 유쾌했던 만남. 모든 순간이 나라는 사람을 성장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라 생각하면 단 한순간도 버릴 것도 후회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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