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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annie Apr 06. 2024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중요한 건 꺾여도 그러려니 하고 묵묵히 하는 마음

팬데믹도 다 끝난 이 시점에 처음으로 코로나에 걸렸다.


남들 다 걸릴 때 안 걸리고, 심지어 확진자와 같이 밥을 먹고 마주 보고 회의를 해도 나 혼자 안 걸리길래 '와, 나 그 슈퍼 유전자인가 뭔가 하는 사람 아니야? 어떻게 이렇게 무적일 수 있지?' 자화자찬했는데, 오히려 남들 다 걸리고 팬데믹 종식이 논의되는 이 시점에 별안간 코로나에 걸렸다.


남들 다 놀러 나가는 봄방학 동안에도 어디 가지 않고 연구실에 처박혀 일만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본의 아니게 일주일 가까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하면서 강제로 휴식을 취하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첫 이틀 빼고 이후에는 하루에 단 몇 시간이라도 책상 앞에 앉아서 작업을 했으니, 아주 잃어버린 일주일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계획대로라면 정확히 일주일 전에 교수님께 논문 제안서를 보내드리고 이번주 초에 면담을 해서 이제 한 달 밖에 남지 않은 이번 학기 동안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향후 계획을 세웠어야 했다. 그런데 내가 아파서 휴업에 들어가는 바람에 당연히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난 교수님께 메일을 드리지 못했고, 5주 남았던 이번 학기는 이제 4주밖에 남지 않은 상태다. 열심히 해도 모자랄 판에 시간이 더 지체되었으니 희망은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어 며칠 마음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픈 와중에도 꾸역꾸역 일어나 작업을 하던 어느 날, 갑자기 노트북 화면이 블랙아웃이 되었다. 처음엔 몇 번 재부팅하면 원상 복귀되겠지 했는데 아무리 해도 돌아오지 않았다. 급한 대로 연결해서 작업하던 외장 모니터에 연결했더니 외장 모니터에서는 화면이 잘 들어왔다. 열심히 검색해 본 결과 아무래도 노트북 화면의 백라이트?가 나간 것 같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외부 충돌이 있거나 오래 사용하면 닳거나 접촉 불량 문제로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수리 비용이 워낙 비싸니 차라리 노트북을 새로 사는 게 낫다는 의견들이 다수였다. 절망.


내 노트북은 한국산 브랜드인 데다가 이곳 하와이에는 이런 걸 잘 수리할 만한 곳이 (내가 알기로는) 없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한국보다 기술자 실력은 안 좋고 가격만 비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야 우선 급한 대로 연구실에 있던 외장모니터를 집으로 갖고 와 작업을 하면 되지만, 문제는 앞으로다. 이렇게 외장 모니터에 연결해야만 하는 상태라면 앞으로 카페에 가거나 집 밖에서 일을 할 수는 없을 테니. 게다가 다음 달에 가게 될 학회는 어쩌지? 두 곳에 다녀와야 하는데 큰일이었다.


우선 급한 대로 학과 실험실에서 랩탑을 대여했다. 내 연구 관련 일이야 내 노트북에 외장 모니터를 연결해서 하면 되는데 주 3회 있는 학부생 대상 강의에 노트북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강의실에 데스크탑이 없기 때문에 매번 내 노트북을 가져가서 연결하는데, 내 것이 고장 났으니 일단 대여를 해서 남은 4주 강의를 해야 한다. 실험실에 있는 노트북 중에 가장 좋은 브랜드 제품으로 대여해 왔다.


그렇게 절망스러운 상황을 하나하나 해결하고 한숨을 돌리다가, 문득 이미 흘러가 버린 시간, 내가 일부러 아픈 것도 아니고 부정적인 생각은 해봤자 아무 득도 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막상 생각해 보니 유학 이래 목이 아주 조금 붓는다든지, 코가 막힌다든지 자잘하게 아팠던 적은 있어도 이렇게 정말 일주일 가까이 아무것도 하지 못할 정도로 크게 아팠던 것은 처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 감사한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결심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감사하게 생각하자. 감사한 것들을 이 참에 한 번 적어볼까?'


인생은 나에게 일어난 일 10%와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이 90%를 차지한다고 했다. 코로나는 피할 수 없었지만 그에 대한 내 해석과 감정은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있겠지. 워드 문서를 열고 곧바로 감사한 것들을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1. 지금까지 크게 아프지 않고 건강히 지낼 수 있었던 것

2. 걱정해 주고 마음 써주는 주변인들이 있음에 감사

3. 한국에 있는 가족들도 건강히 무탈히 지내고 있음에 감사

4. 일주일 간 아파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대신 봄방학 때 열심히 해놓았으니 이 정도로(?) 손실을 얻은 것에 감사

5. 몸이 점점 나아지고 있어서 감사

6. 그래도 요리를 하거나 청소를 하고 장을 봐오는 등의 일은 할 수 있을 정도로 에너지가 있어서 감사

7. 미국에 올 때 혹시나 해서 한국에서 코로나 약을 지어왔었는데 이 약 덕분에 그래도 좀 더 빨리 회복한 것 같아서 감사

8. 배고플 때 먹을 수 있고 목마를 때 물 마실 수 있어서 감사

9. 눈을 뜨고 일어나 걷고 움직일 수 있는 건강한 사지를 주심에 감사

10. 새로 노트북을 빌려올 수 있는 환경에 있게 해 주심에 감사


그리고 더 많았지만 이쯤에서 생략.


한 동안 연말 시상식에서 모 아나운서가 한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문구가 유행을 했었다. 이번에 크게 아파보니, 아니 어쩌면 유학 생활 내내 이런저런 크고 작은 시련을 겪으면서, 마음이 꺾이지 않는다는 것도 어쩌면 힘든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유학생활은 매일이 마음이 꺾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것만 끝나면 그냥 다 접고 한국 가야지, 내지는 지금 당장 그냥 다 그만두고 한국 가고 싶다는 생각을 최소 단 한 번도 하지 않는 유학생이 있을까? 그래도 그렇게 아무 희망도 없어 보이는 터널 같은 밤이 지나고 나면 그다음 날 아침 일어나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논문을 읽고 글을 쓰고 멀쩡히 강의를 나가는 나 자신을 본다. 어쩌면 중요한 건 마음이 꺾이지 않는 게 아니라, 마음이 꺾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이런 시간이 왔구나, 그렇지만 다시 일어나면 되지, 하고 무릎을 세워 일어서는 끈기가 아닐까? 넘어지지 않는 게 아니라 넘어진 후에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는 회복탄력성이, 내 생각에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인 것 같다.


작년 말에 학회 발표와 진행 중인 실험 때문에 크게 골머리를 앓은 적이 있었다. 정말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그 시간이 벌서 반년 전이다. 그 사이 나는 그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실험을 끝내고, 그 결과를 학회 나가서 발표도 하고, 우려와 달리 좋은 반응도 얻고, 그리고 또 다른 연구로 이번에 다른 학회에 나가서 발표를 할 예정이다. 인생은 결국 그런 것 같다. 한 달 전 내가 죽어라 했던 고민들은 어느 순간 정신 차리고 보면 과거의 일이 되어 있다. 나이를 먹는다 해서 힘든 일이 덜 힘들어지는 건 아닌데, 그래도 이전에 비슷한 시련이 왔을 때 꾸역꾸역 버텨서 지나온 나 자신이 증거이기 때문에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마음으로 버티게 되는 것, 그것이 나이 먹는 것의 장점인 것 같다. 이 또한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슬프지만 인생은 시련 없이는 성장도 없음을 나는 이제 경험으로 알고 있다. 아직까지는 '그래도 겪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시간들도 있지만, 조금 더 나이를 먹으면 그 힘들고 아팠던 시간들마저 끌어안을 수 있겠지. 나는 매일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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