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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dy Mar 28. 2024

32.99살, 삼성전자를 떠나며

몇 시간 전, 퇴직서를 제출했다. 입사 2년 차 때부터 고민했는데, 7년이 지난 이제야 삼성을 떠난다.


모든 게 고도로 분업화되어 있는 대기업의 특성상 나는 내가 어떤 일을 해왔는지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일에서 내가 열정을 다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고 하루하루 그럭저럭만 보내왔기에 돈을 더 받을 일도, 덜 받을 일도 없었다. 내가 하는 일과 내가 버는 돈 사이는 단절되어 있었고, 그렇게 버는 돈이었으니 소비도 가벼웠다. 하는 일, 버는 돈, 쓰는 돈 사이의 단절은 어딘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나는, 내가 해온 일들이 내 가치관 안에서 별로 가치가 없었다는 것을, 그럼에도 과분한 월급을 받았다는 것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기만 했다. “밖은 지옥이야”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며 내가 회사에서 얻는 것들이 나를 그다지 행복하게 하지 않는데도 그것을 과대평가해왔다.


물론 이런 상황을 자신의 삶과는 별개로 떼어놓고 회사를 건강한 마음으로 잘 다니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 똑같은 조건이라도 사람마다 느끼는 고통의 크기는 다르다. 얼마 전에야 깨달았지만 나는 내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에 대해서, 마치 표류하는 배 위의 사람이 느낄만한 불확실성을 분명히 느껴왔고 그 속에서 너무 오랫동안 불안감에 힘들어했다.


사실 입사 초기에도 이런 불안감을 느꼈었지만 어느샌가 그 감정마저 익숙해져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게 되었었다. 재밌게도 내 안에서 불안감을 다시 알아차리게 된 것은 탈모 해결책을 찾는데서 시작됐다. 단순히 호르몬 문제라고 보지 않고 정말 깊게 깊게 파고들어 가다 보니 진짜 원인은 내 안에 단단히 자리하고 있던 불안감이었다. 이 불안감은 나의 모든 에너지를 갉아먹고 있었으며,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고, 내 몸을 망가뜨렸다. 탈모가 아니었다면 나는 불안한 채로 몇십 년은 더 살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불안감이 나이가 든다고 해서, 결혼을 한다고 해서, 아이가 생긴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내가 결혼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내 삶이 표류하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이를 내 삶에 기쁘게 초대하겠는가. 불안감은 내 안에서 어딘가 자신감을 사라지게 했고, 나는 그것을 대신 채우기 위해 이성과 일확천금에 집착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시작할 것이다.


대기업을 오래 다녔지만 개인 사정이 있어 모아둔 돈이 많지도 않고 지금까지 받았던 월급만큼 벌기까지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장 내 한 몸 건사하는데 필요한 돈을 벌 자신은 차고 넘친다.


결혼도 서두를 것 없다. 평생 함께할 사람을 찾는 데 있어 먼저 나 자신을 찾는 것이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나는 더 이상 내 주식이 오르기만을 바라지 않을 것이며, 소개팅에 맘에 드는 사람이 나오기만을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오늘의 이 선택이 올바른 선택이라고 확신한다. 10년 뒤, 20년 뒤, 아니 내가 죽을 때가 됐을 때 나 자신을 칭찬하게 될 선택이라고 말이다.




* 이 글은 2021년 12월에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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