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병시절 군대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잘 몰랐던 난 선임들의 부조리가 부조리 인지도 모르고 왠지 모를 불쾌함에도 입 꾹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밖에서 사회경험을 하고 온덕에 타고난 센스 덕에 난 부조리의 타깃이 되지 않았지만 내 동기는 혹독한 신병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는 어두운 구석에 끌려와 인격모독적인 발언을 들어야 했고, 점호 대기시간엔 수치스러운 행동을 해야 했고, 후임들이 보는 앞에서 모멸적인 대우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운전병이었던 난 영구 파견이 예정되어 있어 그 친구에게 도움을 주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때 당시에 할 수 있었던 거라고는 그 친구의 한탄과 어려움을 조용히 들을 수밖에 없었고, 이 사실을 직속상관 간부에게 조용히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었다.
영구 파견 후 새로운 환경에서 군대라는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자 과거의 무기력했던 나 자신에 대한 안타까움이 생겨났다. 나나 내 동기가 조금이라도 부조리를 대처하는 방법을 알았더라면... 동기가 불필요한 고통을 당할 필요도 없을 텐데, 난 찝찝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지금 그때를 회고할 필요가 없을 텐데.
내가 '마음의 편지'라는 걸 제대로 쓰고 활용할 줄 알았다면 내 동기뿐만 아니라 내 뒤에 오는 후임들도 악습이 철폐된 환경에서 병역의 의무를 다할 수 있었을 텐데.
마음의 편지 :
병으로 하여금 비밀 편지를 통해 지휘관에게 부조리나 어려움을 신고할 수 있게 하는 제도
마음의 편지는 글이나 말을 통해 자신이 겪고 있는 부조리를 간부들에게 토로할 수 있는 제도이다. 직속상관인 소대장 - 중대장 - 반장 급뿐만 아니라 그 위에 있는 대대장, 여단장, 사단장 그보다 더 높은 분들께도 전달할 수 있다. 그러기에 제대로만 터뜨린다면 부대에 존재하는 악습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폭탄이지만 글이라고는 대학교 리포트와 대입 논술 외에는 제대로 써본 적이 없는 대부분의 군장병들이고 어떻게 무엇을 써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작성하기엔 어려움이 많은 것 같다. 나도 그러해서 마음의 편지를 잘 활용하지 못했다.
그러다 ROTC로 군 복무를 해 인사과장이었던 친구의 도움 덕에 이 마음의 편지를 제대로 활용하는 법을 알 수 있었다.
간부의 잘못된 일처리로 지원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했을 때 - 욕설과 충동적 행동, 공포 분위기 조성으로 부대 분위기를 해쳤던 인물에 대한 고발 등등 이 모든 사건사고들을 깔끔히 해결해낼 수 있었다.
마음의 편지 제대로 작성하는 법
이렇게 수차례 마음의 편지를 적어보고 효과를 본 입장에서 병역의 의무를 질 후임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팁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피해사실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그리고 입증 가능하게 작성하라.
말단 대대에서 인사과장으로 일하던 ROTC로 군 복무를 한 동기는 이렇게 말했다. 마편이나 진술서에 나 힘들어요 징징거리는 건 가해자의 처벌과 문제 해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명확하고 객관적인 '사실'을 초기에 작성해주어야지 그에 따라 간부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 우리가 병영 부조리를 당해 힘들다고 징징거리고 견딜 수 없다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마음의 편지를 받는 지휘관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지언정 원리와 원칙 - 규정에 따르면 이런 걸로는 지휘관이 피해 호소인의 마음에 쏙 맞는 맞춤 도움을 줄 수 없다.
이런 안타까운 일을 방지하기 위해 피해사실을 아~~주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기술해야 한다. 피해자의 일관된 진술, 구체성, 입증 가능성은 '징계 위원회', '군법'처리를 위해선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런 것 외에도 갈등 상황의 해결에도 명명백백한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고 내가 원하는 도움을 빠르게 받을 수 있다.
작성할 때에는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에, 어디에서, 누가, 어떤 행위를 했는지, 때렸다면 어느 손으로 어디를 몇 차례 가격을 했는지 등등 까지 말할 정도로 구체적으로 작성해야 한다. 해당 행위를 목격한 증인도 진술서에 작성해두면 좋다. 장소와 시간이 특정되면 CCTV에 해당 행위가 특정될 수 있기 때문에 시간과 장소도 명확하게 적어주는 것이 좋다. 만약, 구타 및 가혹행위로 몸에 상흔이 남았다면 이 또한 남겨두어야 한다. 증거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간부와의 갈등이 있을 때에도 몇 월 며칠 어디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어떤 발언이 있었고 그 결과 어떤 피해를 받았는지 적어주어야 한다.
두 번째, 부조리를 당했다면 작성 내용은 병영생활 행동 강령에 따러서
병영생활 행동강령만약 부조리를 당해 이에 대한 피해 호소를 하고 부대 내 존재하는 악습을 없애고 싶다면 병영생활 행동강령을 침해한 내용을 위주로 작성하는 것이 좋다.
병 상호 간에 부당한 명령이나 지시, 간섭 : 얼차려, 인격을 모독하는 지시(춤춰라, 장기자랑해봐라, 혐오스러운 행동을 하라...), 암기 강요, 악기바리, 금전 각출 등등
구타 및 가혹행위
언어폭력
성 관련 법규 위반
+ 절도
물론 이를 작성할 때에도 구체성과 입증 가능성이 담보하는 게 중요하다!
세 번째, 원하는 조치를 명확하게 작성하기!
지휘관과 간부가 피해사실을 알았고 이에 대한 조치가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항상 그 조치라는 것이 내 맘에 쏙 들게 되지 않는 법이다.
군대에서 내가 여실히 느끼는 것은 어떠한 것을 바란다면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이를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얼굴이 쪽팔릴까 봐, 뭔가 요청하는 게 익숙지 않아서 의뭉스럽게, 간접적인 행동이나 감정적 표현으로 원하는 바를 표현하는 것은 군대에서 전~~~혀 먹히지 않는다. 그곳은 간부다 병사들도 자기 앞가림하기 바쁘다. 간부들은 당직 근무와 밀려온 업무, 병사 관리에도 힘이 들고. 병사들은 그냥 이 공간에 존재한다는 거 자체가 스트레스이고 끌려왔다는 거 자체로 남에 대해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주변 사람을 사려 깊게 살피고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어떤 문제가 발생해 이를 간부가 해결해줄 필요가 있어 마음의 편지를 작성했다면 필요한 조치도 명확하게 작성해주어야 한다. 그래야 지휘관 입장에서도 좋기 때문이다.
가령 병영 부조리에 대해 신고한다면... 절차에 따라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즉각적인 분리가 시행된다. 보복과 2차 피해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이다. '분리'를 요청할 때에도 가해자가 피해자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모르게 <생활관 개편>을 하는 식으로 분리를 할 수 있고, 가해자를 부대 전출을 보내도 되고, 자신의 보직 변경을 요청해 자연스럽게 생활관 분리를 요청해도 된다. 아니면, 스스로 부대 전출을 하고 싶다고 요청하는 방법도 있다.
더 나아가 가해자의 처벌까지 바란다면 '징계위원회'를 열어 시시비비를 가리고 엄벌에 처하고 싶다고 요청할 수도 있다!
이런 조치를 바랄 때 내가 너무 일을 크게 만드는 건 아닌가? 걱정되는가? 하지만 이것은 당신의 권리이다. 부대를 운영하는 지침과 규정에는 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한다면 지휘관은 이에 대한 사실조사와 가해자 피해자 분리를 해야 한다! 이게 FM이다. 그러니 결코 요청을 할 때 괜히 타인의 눈치를 보지 말자.
권리 위에 잠자는 자, 보호받지 못하고. 당당함이 부대 내에서 간부와 병사들 사이에서 오히려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세를 제공해준다.
네 번째, 도움받을 수 있는 대상에게 제출하기 혹은 피해 호소하기
이제 이 정도로 폭탄이 준비되었다면 적절한 지휘관에게 제출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무 말단 명령권자에게 제출하거나 호소한다면 원하는 조치를 받을 수 없거나 유야무야 사건을 묻을려고 할 수 있고, 그렇다고 너무 높은 사람(여단장, 사단장...)에게 알리게 되면 직속상관과 부대장에게는 자신의 권위에 대한 모독으로 느껴질 수 있다.
우리가 피해를 호소할 수 있는 창구는 정말 다양하다.
병사 중에는 분대장, 또래상담병
간부 중에는 직속상관, 주임원사, 부대장, 상급부대 제대장
외부 창구로는 1303, 군사 감찰대, 육대전, 군 상담관
등 우리가 피해를 말할 수 있는 창구는 많고도 많다.
방법은 국인체나 온나라에 있는 사용자 검색을 통해 알리고 싶은 간부에게 카톡이나 문자로 자신의 피해사실을 토로해도 된다. 혹은, 면대면으로 직접 면담 신청을 해도 된다. 스마트폰으로 외부 창구로 연락하는 방법도 있다.
내가 권장하는 바는 '한 단계 위에 있는 사람에게 알리라는 것'이다.
병사 사이에서 부조리가 있다? 그러면 직속상관 혹은 부대장에게 말하면 좋다. 간부와의 갈등이 생겼다? 그러면 그 간부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사람에게 말해라. 인사과장과 갈등이 생겼다? 그러면 그 위에 있는 대대장에게 말하자. 대대장과의 갈등이 있다? 그러면 그 위에 있는 감찰대 - 외부 창구 - 상급부대 제대장에게 알리라는 것이다.
다섯 번째, 삭초제근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칼을 휘두를 때면 후환이 안 생기도록 완전히 끝장을 볼 정도로 휘두르라는 것이다. 삭초제근 - 발본색원해야 한다. 피를 보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된다.
나도 그러했지만 특히나 Z세대를 보며 느낀 점은 단호함과 공격성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알량한 죄책감 - 나도 공격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지는 모르겠지만 칼을 휘두를 때 너무나도 주저한다는 것이다. 부대 전출을 보낼 수 있는데 자기가 생활관을 옮긴다던가. 감찰대에 투서를 보내 간부를 군사경찰대로 보낼 수 있는데 부대 안에서 해결하려고 한다던가(나ㅠ).
단호하고 엄격해야 한다. 내가 '약자'여서 입 다물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명확한 선을 긋고 그곳을 침해하면 나도 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한다. 사람의 본성은 간사해서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고, 한계를 정하지 않으면 끝도 없이 침해한다. 위험한 줄 모르면 계속 실수를 반복한다. 내 영유권을 침해한 사람을 따끔하게 찌르고, 그 위세를 보여주어야 오히려 2차 피해를 막을 수 있고 자신의 군생활에도 도움이 된다.
새로운 환경, 새로운 규율이 지배하는 공간이 군대이지만 그 속에도 최소한의 인권 보장과 보편적 윤리는 흐르는 공간임을 꼭 알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