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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업하는 선생님 Dec 26. 2021

비참한 현실 속에서 자신을 구원하는 법 -1

세계는 끔찍하고 고난이 만연한 곳이다 /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삶은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악의 세계

불교에서는 삶이란 고해라고 했다. 부처는 태어났다는 것만으로 끔찍한 늙음과 병, 죽음들이 눈앞에 놓여있는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쇼펜하우어는 삶은 생각할 수 있는 세계 중 최악의 세계이며 삶에선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했고 세계는 지옥 같은 장소라고 여겼다.


우리는 2일의 주말을 위해 5일을 노예처럼 일한다. 군인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 20대에 2년을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밤늦게 철야로 일을 하고 잠시 눈을 붙이고 다시 새벽같이 일어나 일을 해야 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시시포스처럼 돌덩어리를 산 위로 밀어 올리고 그것이 굴러 떨어지면 다시 밀어 올려야만 하는 존재처럼 보이고 영원히 지구를 떠받치는 아틀라스처럼 고통스러운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를 짊어진 아틀라스, 그의 견디기도 힘든 무거운 짐은 우리의 삶과 닮아보인다.

하지만 가끔은 이 사실을 모두가 잊고 있는 듯하다. 어린 학생들과 갓 대학생이 된 아이들은 부모의 따뜻하고 안온한 품 속에서 자라나 현실의 냉혹함을 겪어보지 않아서 그런 걸까? 애어른들은 술, 담배, 유튜브, 몇 천 년동안의 인류 문명의 식품 공학의 정수가 담긴 음식들 때문일까? 고통의 존재한다는 감각을 진통제로 없애버린 것만 같다. 하지만 가끔씩 그 이상을 깨부수는 망치가 그 고통이 존재함을 상기시키면 모두가 다시 소스라치듯이 놀라 이상주의를 보여주는 '파란 약'을 재차 먹는다.

  

그러다 잠시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게 만들어주는 진통제가 존재하는 세계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아니 진통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누려왔던 모든 것이 사라진 세계에 짐승으로 전락한다면 어떠할까? 스마트폰도 뺏기고, 가족과 가까운 친우의 소식도 듣지 못하며,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사회적 지위와 돈을 잃어버린 채로 말 그대로 인간 그 이하의 취급을 당한다면 어떠할까? 음식은 그 맛도 형편없고, 몸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쥐꼬리만큼 받게 된다면 말이다.  


말 그대로 그런 '벌거벗은 실존'인 상태로 되돌아간 사람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정신과 의사이자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죽음의 위기를 넘어서 살아 돌아온 '빅터 프랭클'이다.


모든 것들이 소실된 상황. 평범한 삶에서 당연했던 물질적, 정신적, 심리적 자산들이 철저히 박탈당하는 곳.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빅터 프랭클'에게서 작게는 군대에 입대하게 된 장병들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정신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사랑의 실패, 비루한 직장살이, 생로병사 등 인생 전반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교훈을 우린 얻을 수 있다.




빨간약을 먹어라. 


메트릭스 속 네오는 모피어스에게서 선택을 종용받는다. 이상적이고 평안하지만 거짓인 세계에 머무르게 하는 '파란 약'을 먹을 것이냐, 아니면 진실되지만 고통스럽고 비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빨간약'을 먹을 것이냐. 우린 그중에서 '빨간약'을 먹어야만 한다. 세상엔 고통이 가득 차고 상처가 만연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마치 저자 빅터 프랭글이 강제로 빨간약을 먹어야 했었던 것처럼.

빨간약과 파란약 - 영화<메트릭스1>중

밤거리를 배회하며 습격을 하고자 하는 밤 신사를 무섭다고 안 볼 것인가? 주먹이 날아오면 눈을 부릅뜨고 어딜 공격하는지 알아야 덜 아프고 안 아프도록 대처할 수 있지 않는가? 단맛 만을 즐기다 쓴맛을 먹게 되면 더욱 쓰라린다. 달리기와 마라톤, 운동은 원래 고통스러운 것임을 알고 있으면 덜 아프고, 중간에 단련을 멈추지 않을 수 있는 법이다. 수험생활을 할 때에도 수험 생활이 절망으로 가득 차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지 고통을 견딜 수 있고 고통에 맞설 수 있다. 그래야지 멈춤 없이 내달리고 소기의 성취를 만들 수 있는 법이다. 사랑을 구애할 때 거절이 당연하다는 것을 알아야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삶에는 고통이 만연하고, 그 고통을 피할 수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현실에서 도피하고 즉각적인 만족과 본능적인 욕구를 위해 행동하면 그 고통이 쌓여만 가고 우리가 가장 위태로운 순간 우릴 덮칠 것이다. 고통과 성장은 함께 따라오는 것들이다. 고통을 피하면 성장을 피하게 되고 겉모습만 어른이고 어떤 내실도 없는 기괴한 존재가 된다. 직업도 집도 의미 있는 경험도 그 어떤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 중년을 생각해봐라. 고통이 필연적인 현실을 외면하고,  파란 약 만을 먹어온 사람의 최후일 것이다. 가상과 망상의 세계에 살아간다는 것은 현실을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이고 다시 말하면 현재와 현실을 박탈하는 행위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에도 분명히 무언가를 얻을 기회란 존재한다. 경제적 사회적 성취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가 자신의 정신력을 시험하고 자신을 증명할 기회는 존재한다. 실패에 반대말은 회피하고 도전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을 희망 가득 차고 어머니의 품 같이 긍정성으로만 가득 차있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갑자기 그 망상을 깨부수는 도끼가 날아오게 되면 절망감과 고통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반대로, 세상이 원래 행복보다는 고통으로 가득 차있다고 생각의 근간을 바꿔보아라. 삶은 고해라는 걸 가슴 깊이 새겨두어라. 그리고 고통은 절대 회피할 수 없고 회피하면 할수록 빚처럼 쌓여 일순간에 날 덮칠 거란 것을 알아라. 고통을 껴안고 성장을 해야 한다. 내 삶은, 우리의 세상은 어떻게든 잘 굴러가고 긍정적이라는 생각, 그 안일함을 철저하게 해체하라. 그러면 오히려 매 순간이 감사하고 작은 행운에도 행복감은 더욱 크게 느껴질 것이다. 예상치 못한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더 의연하게 대처하고 아니면 오히려 고통을 피할 수도 있 고통을 성장통으로 바꿔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불교에서는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마라'라고 한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고통이 있는 데 그것이 '첫 번째 화살'이다. 하지만 상황에 대한 엉뚱한 '반응' 때문에 마음속에서 안 받을 수도 있던 괴로움을 겪는다. 그 괴로움이 바로 두 번째 화살이다.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손에 압정이 박힐 때 고통스럽다고 울기만 하는 <반응>을 우린 선택할 수 있고, 재빠르게 압정을 빼고 약을 바르는 <반응>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런 선택을 하면 압정이 손에 박히는 '첫 번째 화살'을 우린 피할 수 없었지만, 상처가 덧나고 더 오랜 시간 아파하는 '두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있다. 덜 아플 선택을 할 수 있다.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부자라면 겪을 일 없는 고통을 겪는 '첫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없지만, 비관주의와 향락에 빠져 더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두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있다.


지옥보다 더 극한 상황, 지금까지 겪어본 고통보다 더 극심한 아픔을 겪는 상황 속에서, 벌거벗어져 묶여 내던져져 대부분의 자유가 구속되어 있어도 우리에겐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유가 하나 있다고 한다. 스토아학파에서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라고 한다.


우리는 상상 이상으로 많은 '선택'을 할 수 있고 습관적이고 관습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새로운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선임이 부당한 행동을 할 때 조용히 그 행동에 무력하게 순응할 수도 있고, 반대로 불공평한 처사에 항의를 하는 태도를 <선택>을 할 수 있다.

집안은 가난하고, 어머님은 우울증에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에 힘들게 육체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거지 같은 상황에 한탄만 하며 부모님을 원망만 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이 바닥을 내딛고 일어서 성공하겠다는 마음가짐을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는 습관적인 반응에서 벗어나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힘과 자유가 분명 존재한다. 잠시 잊고 있을뿐이다




글을 마치며...


현실이 고통으로 가득 차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면 우린 더 능동적으로 외부의 고통과 자극에 반응할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자극'과 '반응' 사이에서 우리가 '덜 고통스러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력하게 외부 세계에 순응하는 게 아니라 미약하지만 저항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가장 편리하게 익숙한 방법으로 저항할 수도 있다. 농담을 따먹거나, 술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던가, 게임에 빠진다던가, 향락에 빠진다던가 등등 하지만 그런 순간적인 위안들로는 부족하다. 그런 진통제를 사용하지 못하는 순간이 분명 온다. 술과 맛있는 음식을 계속 먹게 되면 몸을 좀 먹는다. 수험생이 술과 게임, 스마트폰에 빠져 현실을 도피할 시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군 훈련소에 입영하면 한 달여 동안 술도 게임도 스마트폰, 여자도 없고 제 몸도 자유롭게 못 움직이는데 일상적으로 남용해온 진통제로는 부족하다


그러면 우리는 그 어떤 순간에도 미약한 저항을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까? 답은 위에서 가르쳐주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 우린 그 자유를 이용하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덜 고통스러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죽음의 수용소와 훈련소의 기가막힌 유사성 / 출처 : SBS NEWS

그러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삶을 대해야 할까?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의 풍파를 넘겨야 할까? 어떻게 해야  스마트폰도 뺏기고, 가족과 가까운 친우의 소식도 듣지 못하며,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사회적 지위와 돈을 잃어버린 채로 말 그대로 인간 그 이하의 취급을 당하는 상황 속, 음식은 그 맛도 형편없고, 몸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쥐꼬리만큼 받게 되는 시간 속(그 공간은 빅터 프랭클의 수용소일까? 모든 대한민국 남성이 경험하는 훈련소일까?)에서 우린 버텨나가고 오히려 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그 내용은 다음화에 이어서 전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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