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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업하는 선생님 Dec 29. 2021

비참한 현실에서 자신을 구원하는 법-2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바라보기

우리 모두는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대지만
누군가는 밤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 오스카 와일드-


앞 글에서 우린 실이 고통으로 가득 차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게 더 나은 선택임을 알았다. 그리고 자극(외부에 주어지는 고통)과 반응 사이에서 우리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가장 편리하게 익숙한 방법으로 덜 고통스러운 선택을 할 수 있고 하지만 그런 '진통제'를 선택할 수 없는 때가 찾아온다는 것도 분명히 알았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진퇴양난에 순간에도 미약한 저항을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반응'을 해야 할까? 답은 전 글에  가르쳐주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 우린 그 자유를 이용하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덜 고통스러운 선택'을 할 수 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견뎌낼 수 있다


우린 고통, 죽음, 시련이 무의미하고 삶에 소중한 것들을 앗아가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만 하는 것으로만 느낀다. 지만 고통은 피할 수 없고 고통을 피하면 피할수록 그 고통이 쌓이고 쌓이다 터져 나와 우리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성장은 고통을 요구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실재로의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조던 피터슨의 말을 빌리자면 30대가 되도록 직업도 경제적 성취도 얻지 못하고 의미 있는 경험을 만들어내지 못한 사람을 보고 '역겨운 늙은 아기'라고 미성숙한 존재로 여겼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사회 내던져진 자의 모습은 비참할 따름이다.


그러면 이 고통의 필연성을 알았으니 고통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보자.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


불과 한 세기도 전에 우리는 인간의 순수한 악의의 결과가 어떠한 모습을 만들어 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2차 세계 대전의 나치 독일은 순수한 아리아인이라는 그들의 정의 아래 인종학살을 저질렀고, 소련의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인의 농사 체계를 악의적으로 파괴시켜 수천만명의 사람을 아사로 몰아붙였다. 가까운 중국은 문화 대혁명을 통해 아들이 부모를 죽이게 하고, 찬란한 고대 유산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죄 없는 인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우리 내면에는 분명 악의와 원한, 분노, 맹목성, 광기 등이라고 숨겨져 있는 악마의 씨앗이 존재한다. 내면에 악마의 씨앗이 존재하는 만큼 반대로 우리에게는 천사의 씨앗 또한 숨겨져 있다. 우린 가혹한 환경, 시련 속에서 그 천사의 씨앗을 발아시킬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비정하고 죽음이 맴도는 2차 세계대전 독일의 수용소로 떨어졌다고 생각해보자. 당신은 강인한 신체를 가진 남성이고 쥐꼬리만 한 식량배급과 매일매일 지속되는 강제 노역으로 몸과 정신의 쇠약해져 간다. 그런데 주변에 당신보다 힘이 약한 노약자들이 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우린 춥고 배고픈 수용소라는 환경에서 환경 탓을 하며 타인의 물건을 빼앗고, 음식을 강탈하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린 배부름을 느끼고 무언가 우월한 인간이 되었다는 느낌을 느낄지도 모른다. 약자를 보호하는 도덕을 지키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가 간수 탓, 간악한 나치 탓을 하고, 부족한 식량을 탓하며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왜 우리가 '선'을 이행하는 자를 높게 여기는가? 보통 인간이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을 하기에 우리는 그것을 영웅적인 행동으로 숭상하고 높은 가치로 여긴다. 우리는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상황, 잔악한 환경 속에서 자신을 정당화하지 않고 선의를 지키는 행동을 함으로써 나 자신의 존엄을 높일 수 있다.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천사의 씨앗을 발아할 수 있다. 도덕적 인간으로 변화할 수 있다.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우린 일상생활에서도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다. 생에는 고통이 만연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태어났다는 그 이유로 생존을 하기 위해 끓임 없이 고통을 받아오고 있다.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주어진 권리와 자유를 일부 박탈당하고 군대에 들어왔다는 고통을 받고, 직장에서는 마음이 맞지 않는 상사와 동료에게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가정에서는 자신의 마음과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을 보면 울분이 쏟아져 나온다.

  

고통을 원료 삼아, 나는 힘들었기 때문에 이 주체할 수 없는 화를 타인에게 쏟아내도 된다는 정당화를 할 수 있다. 상처를 주고 그때 잠시 자신의 비참한 환경을 비난하며 이성을 잃었다고 변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린 반대로 군대에 뒤늦게 들어온 후임에게 따뜻한 행동을 할 수 있다. 직장에서 받은 상처를 가족들에게 풀지 않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들도 그 나름의 삶의 무게를 지고 있기에. 우린 이런듯 같은 처지에 고통받고 있는 자에게 공감하고 위로하고 따뜻한 한 마디를 던짐으로써 '도덕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시련 속에 숨겨진 성장과 성숙의 의미


앞서서 말했지만 성장을 위한 고통은 필연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어떻게는 되겠지라는 안일함으로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인생에 주어지는 책임과 과제를 외면하면 그 책임과 과제가 자신을 뒤덮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임용고시 수험생활을 하며 겪었던 실제 경험이다.

수능, 공무원 시험, 각종 고시를 겪어본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해뜨기 전에 일어나 책 보고, 암기하고, 인강 보고 해가 진 후 자기 직전에야 집에 들어가 쉰다. 보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 모든 것을 스스로 포기하고 하루 종일 의자에만 앉아 연필만 잡아야 한다. 심지어 먹고 싶은 것도 먹지를 못한다. 왜냐? 먹으러 갈 시간에 먹을 시간에 학식이나 가까운 밥집에 가 재빠르게 밥을 먹고 그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하니까. 남들은 나보다 앞서 나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난 왜 이렇게 뒤처져 있는 것 같지? 불합격과 뒤쳐진다는 불안감과 마음만큼 잘 해나가지 못하고 그 와중에 한심하게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죄책감, 수치심 등등


왜 난 이런 비참한 공부를 해야 하지? 임용고시를 내가 왜 봐야 되는 거야?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절망과 내적 고통과 가득 찬 상황에서 이런 고통을 정당화하고 견뎌내게 해 주고 결국 큰 성취를 만들게 해 준 것은 고통에 이면에 존재하는 숨겨진 '의미'를 찾았기 때문이었다.


흑연 덩어리가 강한 열과 압력이 있었기에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내게 주어진 '시련'은 날 다이아몬드로 만들어내기 위한 과정이었구나!


신은 인간에게 선물을 줄 때 시련이라는 포장지에 싸서 준다. 선물이 크면 클수록 시련도 더욱더 커진다.
- 딕 그레이스

아! 신께서 얼마나 나에게 큰 선물을 줄려고 이렇게 큰 포장지를 주는 거지?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굶주리게 하여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나니.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을 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그 기국과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 맹자

하늘이 날 정말 귀히 여기는 구나 그래서 날 담금질하여 기국과 역량을 길러주고자 하는구나!


오히려 더 나은 나를 위한 성숙에는 고통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자 내가 겪고 있는 고통이 즐거운 환희로도 느껴지도록 했다. '예수 콤플레스'처럼 이 비참한 상황이 나 자신을 특별하다는 증거로 여기게 만들었다. 고통을 겪지 않는 사람들보다 내가 더 낫다는 증거로도 여겨졌다


시련과 고통 속에서 '성장과 성숙'의 의미를 찾았기에 그 고통을 견뎌내고 결국 '성장과 성숙'을 할 수 있었다. 교사가 될 수 있었고,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앞으로 어떤 고통이 와도 견뎌내고 나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 난 하고자 하면 되는 사람이라는 '자아효능감', 난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약간은 광적인 배짱 혹은 신념 등등을 배양할 수 있었다. 초월적 존재에게 선택받았다는 일종의 자부심은 성장의 담금질을 견뎌내게 만들었고 발전을 만들어냈다. 이 발전의 증거를 보고 난 역시 성공이 예정된 자라는 믿음이 강해지기도 했다. 어찌 보면 긍정적 선순환으로 날 밀어 넣게 된 것이다.  




늙음과 죽음, '삶의 일회성'의 다른 일면

 

인간은 결국 늙고 병들고 죽음에 빠진다. 우리는 어린 시절의 무지함으로 이 생로병사를 외면하고 삶의 아름다움 면만 바라보고 지낼 수도 있다. 또는 골치 아픈 생각은 따윈 던져버리고 일차원적인 자극 속에 자신을 내몰아 이 비관적인 상황에 도피할 수도 있다. 향락에 빠져 이 채울 수 없는 공허를 일순간 잊어보자!! 살아가는 게 이리도 고통스러운 데 차라리 이 고통스러운 삶을 파괴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어차피 늙으면 모든 것은 바래지고 잊고, 잃어버릴 텐데, 지나간 젊음과 가능성은 되돌아오지 않을 텐데 하지만 빅터 프랭클은 말한다. 우리가 경험했던 모든 일, 생각들 모든 것들은 과거로 흘러갔지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존재 안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간직해 오고 있다.


우리는 젊음이라는 잠재적 의미, 기회, 가능성을 시간이라는 마법과 섞여내어 되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저장하고 보존시켰다. 우린 과거라는 충만한 곡물창고, 인생의 수확물을 쌓아놓은 것들을 바라보며 충실하게 살아온 과거를 보며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태도로 삶을 바라보게 되면 나이 들어 버린 자신을 바라보며 가능성(젊음) 대신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다. 곡물창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충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가능성을 실체를 만들기 위해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구나 라는 약간의 다급함을 우리에게 만든다. 아! 나는 현재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의 나'를 위해서도 노력해야 하는구나! 우리는 자신의 잠재력과 가능성, 숨겨진 기회를 낭비했음에 대한 원망과 억울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잠재력이라는 나의 숨겨진 재산을 알았기에 부단하게 자신을 내몰게 된다.


죽음에 대해 직시하고 익숙해지면 질수록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느끼게 되고 나에게 정말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인식하게 된다. 삶에서 비본질적이고 쓸모없는 군더더기를 걷어내고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게 된다. 싯다르타가 생로병사의 현장을 보고 괴로움을 구원하는 선지자가 되었듯이 우리도 늙음과 죽음 '일회적 삶'을 묵시하고 배부르고 따뜻한 나 자신만을 만족하는 그런 삶이 아닌 내 일회적 삶을 가치 있는 그 무언가로 만드는 자가 될 수 있게 된다.



글을 마치며...


빅터 프랭클은 인간이 안 맞아도 되는 '두 번째 화살'(두 번째 화살에 대한 비유는 첫 번째 글을 읽어보길)을 맞게 된 이유를  "존재에 대한 <의미>와 <책임>을 발견하지 못한 데에 있다."라고 보았다. 린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가치를 알게 되면 그 어떠한 고통이라도 견뎌낼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 가치, 그 의미가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이 없다. 그것이 가족, 내일 만나게 될 가족, 곧 개봉될 재미있는 영화 등이 되어도 괜찮다. 의미는 다른 사람이 보기에 미미해 보여도 그 한줄기의 의미가 삶을 지탱해준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위에서 내가 말한 삶을 대하는 태도는 내가 찾은 나만의 '의미'일뿐이고 그것이 나에게 강렬한 변화를 일으켰고 현재에도 단단한 나무뿌리처럼 나의 근간이 되었기에 소개해주고 있을 뿐이다.  


사실 우리는 시련을 겪으며 다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잃은 적은 거의 없다. 건강, 관계, 행복, 전문성, 재산, 지위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이용하고 삶을 멈추지만 않으면 모두 나중에 다시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지속하게 하는 한 줄기의 빛(의미, 책임, 가치...)만 있으면 된다. 


여러분들도 나만의 의미를 찾길 바란다.
그리고 내가 찾은 의미를 가치 있게 활용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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