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그의 책을 읽으니 내 안에 책 읽는 뇌가 모처럼 세로토닌이 발산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읽으면서 문득문득 이윤기처럼 살면 좋겠다 싶다. 인생을 흔히 고해니 고통의 연속이니 하며 세상 못 살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꼭 그러기만 하겠는가? 인생은 유레카다. 발견에서 기쁨을 누리고 희열을 느끼는. 그런 것 없이 재미없어 어찌 살겠는가.
그는 책에서 자신에겐 행복한 징크스가 있다고 했다. 그는 뭔가에 관심이 생기면 꼭 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여건과 환경이 생긴다고 했다. 이를테면 오랫동안 작가와 번역가로서 어떤 책이나 분야에 관심이 생기면 꼭 출판사로부터 그 분야에 대한 번역이나 조사를 의뢰받는다고. 원서를 정독할 절호의 기회가 생기고,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즐거움에 출판사에선 돈까지 준다고 하면서 '책 읽기', '책 옮기기'에 관한 한 자신은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쯤 되면 그는 꽤 행운아처럼 느껴진다.
이왕 행운아란 말이 나왔으니 잠시 생각해 보자. 그거 왠지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만 같다. 그렇지 않은가? 남은 그렇게 좋은 일이 많이도 생기는데 나만 안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행운도 하늘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작가 이윤기는 자신이 그럴 수 있기까지는 어느 정도 떠들고 다닌다고 괄호 쳐 놓고 얘기한다. 작가의 괄호 친 말은 보통 내용과 크게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참고로 밝혀둘 때 쓰이기도 한다. 우린 바로 이런 괄호 쳐 놓고 하는 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고 행운이라는 것도 그냥 가만히 있는데 굴러들어 오지 않는다. 그것도 알고 보면 준비된 자에게 들어온다. 그러니 행운을 원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떠들어라. 그래야 행운이 알아듣고 그 사람에게로 갈지 모른다.
그런 것을 보면 난 왠지 작가가 인생의 묘미를 아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겸손하게 말해 '행복한 징크스'란 것이지 알고 보면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 가는데 타고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즉 좋게 말하면 책략가고, 나쁘게 말하면 꾀돌이라고나 할까.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야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요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관심 있어하는 쪽은 늘 책이었다. 그는 60년 대 초 한 출판사에서 초등생을 겨냥한 각각 100권짜리 소설 전집과 위인 전기을 읽으면서, '일찍이 나에게, 장차 무슨 짓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다고 술회한다. 그의 입말이 참 좋다. 무슨 짓을 하면서, 어떻게 사냐니.
그러고 보면 꽤 일찍 발견한 것 같다. 그것을 발견하고 가슴은 얼마나 뜨거웠겠는가. 그리고 그건 훗날 번역으로, 신화 연구로, 소설가로 아깝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직함으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지만, 많은 독자들이 기억하기는 그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와 움베르고 에코의 여러 소설 그중에서도 <장미의 이름>을 번역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희랍인 조르바>의 번역은 그 말고도 몇 명의 번역자들이 더 있다. 그리고 이윤기를 포함해 대부분 영역을 번역한 것으로 아무리 번역이 뛰어날지 몰라도 중역의 오명을 피하지 못한다. 게다가 완역본도 최근에야 나왔다. 물론 난 아직 그 누구의 번역본으로도 읽지 못했지만 그 누구의 번역본을 읽는다면 이윤기 번역본은 꼭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만큼 오래전부터 그의 번역본이 갖는 아우라가 결코 작지 않으며, 그 역시 그 소설은 자기 문학의 '성서'라고까지 했다. 그러니 이윤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번역본을 읽지 않는다면 그건 그에 대한 예의는 아닐 것이다.
또 그래서일까? 이윤기에게서 왠지 조르바의 느낌도 나는 듯하다.(나는 책으로는 못 읽었지만 영화로는 봤다. 영화 속 조르바 역을 맡은 앤서니 퀸은 그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책에서 조르바의 그림자를 느낀다는 건 엉뚱하게도 그가 움베르코 에코의 <장미의 이름> 번역을 언급할 때다. 움베르토 에코가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당연 이태리어로 글을 썼겠지만, 그는 이태리어를 번역했던 것이 아니고, 영어로 된 것을 번역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번역은 철학자 강유원 박사로부터 찬사와 오명을 동시에 받는다.
옛날 일제 강점기 아무리 유명한 작품도 영어나 일어를 중역으로 하더라도 그게 그렇게 흉이 안 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독자들의 욕구가 높아져 중역은 웬만해선 읽지 않으려고 한다. 게다가 우린 학(學)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가. 물론 학문을 중요시 여기고 그것에 완벽함을 기하는 거야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다가 사대주의에 갇힐 수도 있다.
그도 자칫 그럴 뻔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말하는데 무엇으로 반박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으로 한쪽 구석에 조용히 있으면 그건 우리가 알던 이윤기가 아니다. 그는 에코의 소설을 비롯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오독과 오역으로 인한 질타 속에서도 '중세 이후 유럽의 예술가들이 그토록 다양하게 변주하던 신화에 대해, '창'을 '도끼'라고 썼다고 해서 '문화를 오역한 자'로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111p)라며 반박했다. 그는 어쩌면 학적인 완벽함보다 사상의 자유로움이 더 중요함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닌가 싶다. 그것이 문득 자유인으로 살았던 조르바와 오버랩되기도 했다.
그는 무엇이든지 마음먹은 일은 하고야 마는 성격이다. 우리나라는 단편이고 장편이고 소설을 쓰는 사람이면 무조건 다 '소설가'라고 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오직 장편을 쓰는 작가에게만 그 이름을 허락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라이터(글 쓰는 사람 정도)만을 허락할 뿐이다. 그는 거기서 충격을 받았을까? 나중에 기어이 장편소설을 쓰고 기어코 노블 리스트가 되었다. 그건 좀 우리나라도 배워야 할 것 같다. 미국만 해도 그렇게 장편을 쓰는 소설가를 대우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장편을 꺼려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가 스스로 소설은 죽었다고 말하는 건 바로 이런 분위기가 배면에 깔려있기 때문은 아닐까. 쓰기도 전에 패배의식부터 갖게 되는 이 분위기는 언제쯤 걷히게 될지. 이윤기 작가는 그것을 결단코 허용하지 않는다. 소설 가지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생각을 하냐고 오히려 나무라는 듯하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 문학에 대한 그의 생각들이 이 책 곳곳에 깔려있다. 문득 답답해지거든 문학 선배로서의 그에 대한 생각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호기심이 많고 의욕이 넘치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 싶다.
책을 읽으면 그가 글을 쓰는지, 말을 하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쉽게 쓴다. 한마디로 착착 감긴다. 그걸 두고 껍진껍진한 입말이라고 한다는데,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싶은 대로 쓰는 구어체 즉 입말을 의미한다. 그리고 앞으로 글의 추세는 이렇게 갈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작가 박경덕은 생각하는 대로 글을 쓰지 않고, 말하고 싶은 대로 쓴다는 '말글'로도 설명하고 있는데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지식욕이 대단했다. 그것이 그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욕구만으로도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아 보인다. 지구의 한 귀퉁이에 틀어박혀 숨만 쉬고 살지 말자. 그런 욕구가 있어야 세상을 지루하지 않고 재밌게 살 수 있다.
그런 욕구로 그는 누구보다도 의욕적으로 오래 장수하며 살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살지 못했다. 지금도 그는 책상에 앉아 번역에 몰두하던가, 지중해 어딘가를 헤매고 다닐 것만 같은데 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꽤 된듯하다. 아직도 그의 책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게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