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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수집가 May 27. 2020

문학사도 역사다

내가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사춘기 때 문학 소년이 아닌 사람이 없고, 문학 소녀가 아닌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그 시기에 우리나라 문학을 좋아하기란 게 쉬운 일일까? 잘 알려진 세계 고전 문학이나 읽어낼 수만 있다면 자타 공인 문학 소년, 문학 소녀는 아닐까. 솔직히 나는 그랬다. 그 시절 우리나라 문학이 싫었다. 우리 문학을 읽는다는 게 왠지 뒤쳐지는 것만 같았고, 뭐 별거 있나 우습게 봤다. 쏟아지던 베스트셀러도 그랬지만 근대 문학은 더더욱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때 한동안 문고본이 유행이었다. 특히 삼중당 문고는 주머니 가벼운 문학 소녀와 소년에게 가히 폭발적인 인기는 아니었을까 싶다. 책가방에 그 책 한 권쯤 안 넣고 다니는 학생이 없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난 그런 문고본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럴만도 했다. 너무 채신머리 없을 정도로 작고 볼품이 없었다. 실용성은 좋을지 모르지만 장서용으로는 영 아니었다. 나의 오빠나 언니 세대엔 가능할지 모르지만 나는 결코 그런 책은 갖고 싶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 문고본엔 우리 고전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를테면 김동인의 <감자>나 <배따라기>,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 같은 것 말이다. 책이 좀 근사했다면 적어도 한 번은 서점에서 무슨 책인가 뽑아 봤을지도 모른다. 학교에서도 그냥 권장 도서 정도로만 취급할뿐이지 그 모든 책들은 교과 과정엔 없다. 이렇게 학창 시절 국어 교육은 가능했을지 모르겠지만 문학 교육은 전무했다.

이것이 이 책을 읽고 난 나의 소감 일부다. 그것도 겨우 1권을 읽고.


이 책이 유달리 감동스럽다거나 우리 근대문학을 요약해 보여주는 건 아니다. 무려 권당 500페이지 내외로 5권까지 근현대 우리 문학을 연대기로 보여주고 있다. 역사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도 아는 바도 없지만 유독 일제 강점기 또는 개화기에는 관심이 많다. 그것은 우리나라 기독교사에 관심을 갖다 그렇게 된 것이다. 그렇게 관심을 갖다보면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이상과 백석 등 당대 문학인과 문학 단체와 문학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결국 기-승-전-문학(史)인 것일까.


물론 문학사를 쓴 사람이 장석주 작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동일이나 문학 평론가 김윤식 교수 또 그밖의 학자나 교수들도 쓰긴 했지만 이렇게 대중적으로 알려져 있으면서 개론서겸 대중서로 이 책은 적절해 보인다. 문사철이 그토록 중요하다면서 우리 문학의 역사를 단편적으로도 알지 못한다면 뭔가를 놓치고 가는 것이 될 것이다.


역사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뻗어나갈지 알 수 없다. 정사로 알 수도 있지만 나처럼 어느 특정 분야에 꽂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다. 이 책은 특별히 우리나라 근대 초입은 1900년부터 1934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읽으니 우리나라 근대 사회의 한 단면이 보이는 것 같고, 문학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분야가 아니라는 것도 새삼 알겠다. 몇년 전, 누구라면 알만한 작가가 어떻게 하다 작가가 되었느냐는 질문에 종이와 펜만 있으면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이라서 작가가 되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굉장한 문학적 내공을 감추고 있거나, 문학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거나. 


그 옛날 문학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언문을 깨우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게 문학이었다. 언문은 소위 있는 집 자제나 할 수 있었다. 문학엔 사상과 정서가 담긴다. 글로 세상을 비판하고, 세상을 있는 표현하고, 세상을 깨우치고 싶어 했다. 하나 안타까운 건 당대의 문사들 예를들면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광수를 비롯해 알만한 문사들 거의 대부분이 친일을 했다는 점이다. 험악하거나 간신배처럼 보이는 사람이 친일을 했다면 차라리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처럼 고고하고 선비 정신으로만 무장해 있을 것만 같은 사람들이 애국심은 고사하고 깨어 있는 양심으로도 온전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문인으로서 할 일을 다하지 않았냐면 또 그렇지도 않다. 그들은 작가로서 할 일을 했다. 그렇다면 애국심이나 지식인의 양심과 작가는 별개로 봐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야 이광수가 작가로 제대로 보이지 않을까. 또 이건 나의 사견이지만, 그들 대부분은 있는 집 자제였다. 친일에 저항하면 따라 올 육체적 고통을 쉽게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장의 안위를 도모하고 싶어하는 건 누구나 같다. 결국 문학만으로는 나라를 구할 수 없는 것을 당대 문학인들은 스스로 보여준 셈이기도 하다. 문학의 대의가 구국의 대의를 대변해 주지 못하는 것이다. 


문인들에 관해서는 늘 나의 관심사였기 때문에 이 책을 (늦게나마)읽을 수 있다는 건 굉장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문득 든 생각은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 받기 어렸다고, 자국의 문학이 자국민들에게 사랑 받기는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은 좀 덜할지 모르지만,  요즘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정말 욕하면서 보는 경우가 많았다. 한숨을 푹푹쉬며 그것도 작품이냐며 험담 아닌 험담을 했더랬다. 원래 작가와 독자는 그런 존재다. 어떤 식으로든 입에 오르내리는 작가가 좋지 관심 밖으로 밀려난 작가는 잊히는 법이다. 잊히는 건 또 얼마나 서러운 일이랴. 근대의 작가도 그러지 않았을까. 그들이 언문을 깨우쳤다고 해서 마냥 사람들로부터 환영만 받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언문을 깨우치고도 이것 밖에 못 쓰냐고 희롱의 대상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잊힐지 몰라도 그들의 작품은 100년을 살아남아서 후대에도 읽히고야 만다. 그렇다면 오늘 날의 작가와 그 작품들도 그러지 않을까. 문학의 힘은 그런 것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의 멀쩡한 책이 오늘은 파쇄되더라도 누군가는 그 책의 가치를 인정하고 차곡차곡 모아놓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은 그렇게 세월을 사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읽은 작가의 작품이 앞으로 100년 뒤엔 어떠한 평가를 받을지 알 수 없다. 그것이 또한 역사다. 작가만이 가장 작가답게 현세를 그릴 수 있고 증언할 수 있다.


문득 책을 읽다 작가 홍명희에게 한참 머물렀다. 그는 바로 그 유명한 <임꺽정>의 작가다. 이야기의 구조만을 생각한다면 허균의 <홍길동전>을 떠올리기도 하지만 다른 건 <홍길동전>은 허구의 고대 영웅을그리지만, <임꺽정>은 실록을 바탕으로 인물과 사건을 정밀하게 그렸다는 것이다. 그는 소설가이기도 했지만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시대일보> 사장을 지낸 언론인이기도 했다. <임꺽정>은 1928년에서 1940년까지 몇 번이나 중단과 연재를 반복했지만 끝내 미완성 작품으로 남는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당시 "조선 초유의 대작", "조선 현대 문학의 거탑"이란 찬사를 들으며 소설사에 남을만한 기념비적인 작품이 된다. 


하지만 내 눈길이 오래 머문 건 따로 있다. 그건 그의 독서법이다. 그는 1907년 일본의 다이세이 중학 3학년에 편입해 1910년까지 다닌다. 이 무렵 일본과 서양의 문학 서적을 접하게 되는데, 특히 3학년 2학기 때부터 독서에 매달렸다고 한다. 그는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다. 한 책을 보는 동안 다른 책은 읽지 않는다. 되도록 속히 읽는다."는 자신만의 독서법을 유지하며 도스토예프스키와 바이런과 자연주의 계열의 일본 작가뿐 아니라 금서로 분류된 좌파 사상가들의 저술과 풍기 문란 딱지가 붙은 책까지 섭렵한다.


대단하지 않은가. 특히 요즘엔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비판과 회의가 없지 않은데, 작가 홍명희가 살아 있다면 이 사실을 알면 썩소를 날릴 것도 같다. 사실 내가 학교를 다녔을 때만 해도 이것은 보편적 독서법이었다. 그것을 위해 속독이 유행이기도 했다. 한 책을 다 읽기도 전에 다른 한 책을 슬쩍 끼워 보기 시작하는 버릇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반성해 본다. 물론 비판할 것은 아닌 것 같다. 중요한 건 독서의 성실함일 것이다. 작가 홍명희는 이 독서법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허리를 곧추세우며 책을 읽었을지 알 것도 같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것저것 조금씩 건드려 놓은 책중 하나인 이 책이라도 마치기 위해 허겁지겁 읽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책을 펴낸 장석주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 책 날개 부분에 그가 어떻게 이 책을 쓰게 되었는지가 나와있는데 얼마나 지난했을지 감히 짐작이 간다. 그 덕분에 나 같은 독자는 편안히 앉아 읽어보지 않는가. 참고로 홍명희는 원고자 1만 3천장의 분량을 12년에 걸쳐 쓰고도 완성하지 못했다. 그는 장장 8년에 걸쳐 원고지 2만 장에 걸쳐 이 책을 썼다. 가히 문학계의 수도사답다. 그도 그럴 것이 1992년 필화 사건으로 구속된 후 두 달만에 풀려나 무작정 제주도 서귀포에 방을 얻어 썼다고 하니 말이다. 나는 이 책 마지막 5권까지 다 읽고나면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를 상상해 본다. 생각보다 많이 달라져 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을 안 읽었을 때 보단 달라져 있겠지. 그 한 걸음을 뗄 수 있도록 해 준 저자에게 감사를 전하고 싶다.


아, 그리고 하나. 근대 작가들도 청소년 시절엔 하나 같이 외국 문학의 세례를 받았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사람이 나도 사춘기 때 외국 문학만 읽고 우리 한국 문학은 안 읽었다고 자책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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