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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수집가 Oct 12. 2020

공부는, 암벽 타기 같은 것

한동일 교수를 조금 일찍 만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몇 년 전 모처에서 주관하는 독자와의 만남에 당첨이 됐는데 갑자기 사정이 생겨 가지 못했다. 책을 쓴 저자라는 것도 그렇지만 신부님이라고 해서 과연 어떤 분일까 궁금했다. 그땐 그가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라는 것엔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변호사야 흔하고(?) 단지 이탈리아 그것도 이를테면 교회에서 받은 셈인데 그게 어떤 의민지 잘 몰랐다.) 아무튼 그렇게 허망하게 기회를 날리고 과연 그를 만날 기회가 다시 올까 싶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효자였을까? 뜻하지 않게도 비대면 시대가 도래하면서 TV로나마 그를 볼 수 있어서 행운 같이 느껴졌다. 더구나 그 유명하다던  <라틴어 수업>으로 강연을 한단다. 그렇게 해서 보게 된 그는 신부라기 보단 어느 기업의 전무(?)처럼 보였고, 기대했던 강연은 의외로 그다지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학교 때 우등생이 아니어서일까 역시 나는 '수업'과는 친한 운명이 아닌가 보다 했다.     


그러다 한 달쯤 지났을까? 그가 같은 프로에 또 나왔다. 이번엔 자신의 이름을 단 공부법을 소개한다. 공부도 못한 주제가 자존심은 있어서 난 어떤 수재의 공부 비법을 소개하는 책이나 간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왠지 이 분은 좀 남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면서 신부가 아닌가. 뭔가 공부에 대한 깊은 철학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연은 정말 감동이었다. 난 아무리 좋아도 재방을 보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머리에 남으라고 재방을 봤고, 마침 그 프로 제작진들이 휴가였는지 삼방도 하길래 그것까지 봤다. 그걸 보면서 혹시 이 강연 내용이 책으로 나온다면 난 기꺼이 보겠다고까지 했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여서 나는 약속처럼 책으로도 보았다. 사실 TV 강연은 워낙 짧게 해서 아쉬움이 있었으니. 

학교를 졸업한 지 꽤 오래됐지만 지금도 지식에 대한 욕구가 줄어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지식욕을 항상 채우고 살았다는 건 아니다. 그냥 욕구만 있다.) 그런데 왜 난 한 번도 이런 공부에 대한 강의나 책을 찾아볼 생각을 안 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세월이 좋아졌단 생각이 든다. 교과에 맞는 온갖 정석과 비법을 소개한 그렇고 그런 참고서류는 많아도 이런 책은 나 때는 없었는데 지금이라도 나와주니 말이다.    


우린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공부를 시작한다. 물론 이유는 있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러기엔 그 이유가 너무 깊이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건 너무 강력하기도 하다. 대학에 가기 위해 초등학교에 첫발을 내딛는다고 생각하면 그 아이의 시작은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입시를 치를 때쯤 되면 모든 사람이 다 대학을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텐데 그 출발선이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되어 있다. 모든 사람이 대학을 가는 것도 아닌데 대학을 나오면 일류가 되고 못 가면 이류가 된다. 시스템이 문제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 어느 시점에서 이런 강의를 듣는다면 아이들의 공부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그나마 대학을 가도 그 속에도 또 나뉘고 걸러진다. 설혹 자타가 공인하는 일류대학을 나왔다고 해도 그들은 그들 나름의 열등감을 불태우는 것을 목도하기도 한다. 반대로 지나친 우월감에 타인으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들 때도 있고. 학교를 다니면 다닐수록 성숙해져야 하는데 별로 가까운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숨마 쿰 라우데'란 라틴어 단어가 있다고 한다. 이건 유럽 대학이 성적 평가에 쓰이는 표현으로 '최우등'이란 뜻이란다. 이 말은 타인과 비교해서 가장 우수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거둔 성적 중 가장 우수하다는 표현이라고 한다. 상대평가를 하지 않고 절대평가를 한다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까지가 그나마 이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나 초등학교 때만 해도 막 학교에 들어온 입학생에게 선생님이 숙제 검사를 하면 '참 잘했어요'와 '잘했어요' 도장을 찍어주셨다. (이 두 도장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우리나라 학교 교육의 그 시작은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걸 계속 고등학교 3학년까지 가져갈 수 있어야 하는데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상대평가를 한다. 

 

나는 학교 내내 내가 왜 학교를 다녀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주입식 수업 방식이 너무 재미가 없었다. 오로지 공부만을 위해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게 너무 소모적이고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학교를 다녀야 하는 이유가 여러 개였다면 나의 학창 시절은 그렇게 불행하지마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친구를 사귀고 도시락을 까먹고 자유롭게 상상하는 게 인정되었더라면 나의 학교 생활도 그리 나쁘지마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아예 성적에 포함되지도 않았다. 그런 거야 대학 들어가면 실컷 하는데 뭣 때문에 그런 걸로 시간 낭비를 하냐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학교는 오히려 좋은 친구를 사귀는 데 있지 않고 친구를 경쟁상대로 삼으라고 조장하고 부추기며 자유로운 생각을 억압한다.  


그나마 그 시절을 버티게 해 줬던 건 독서였다. 학교가 너무 싫어서 책 속으로 숨어버렸다. 하지만 이 역시 학교 생활에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책 그만 읽고 공부하라고 할까. 독서가 공부고 공부가 곧 독서여야 하는데 이것이 분리되어 있다. 언젠가 누구라고 하면 알만한 독일인 예능인이 TV에 나와 독일의 교육의 모토는 좋은 친구와 독서와 여행하는 것에 있다고 하는데 어찌나 부럽던지. 그 부러움은 이 책을 읽을 때 또 한 번 마주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수능이라고 할 수 있는 바칼로레아 그것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수능에 해당한다. 나는 프랑스의 학생들도 우리나라처럼 혼자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어려운 시험인 줄 알았다. 하지만 프랑스는 철학과 논술이 아예 국민적 관심 대상이라 입시 문제가 발표되면 하루 종일 카페에 앉아 그걸 주제로 토론을 하고, 지식인들은 그 문제에 대한 답안을 작성해서 신문에 기고할 정도라고 한다. 즉 바칼로레아는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프랑스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축제 같은 거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수험생들이 겪는 시험 공포 같은 건 없겠구나 싶다. 우리는 어떤가. 수능이 끝나면 죽을 때까지 수능에 무슨 문제가 나오는지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정말 우리나라 수능이 문제가 많고 해로운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언젠가 외국에서 우리나라 수능을 평가했는데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걸까? 문제는 학교가 공부하는 학생들로 하여금 자부심을 갖도록 해줘야 하는데 오히려 공포로 몰아간다. 아이들을 닦달해야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이 문제다. 요즘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 때는 시험 문제를 틀리면 틀린 수만큼 매를 맞아야 했다. 완전 스파르타식이다. 그게 얼마나 서럽고 창피하던지. (그런데 중세시대 유럽의 귀족 가문의 자제들도 맞으며 공부를 했나 보다.) 


물론 공부를 말랑말랑하게 하자는 말이 아니다. 말랑말랑한 건 공부가 아닌지도 모른다. 공부가 그리도 중요한 거라면 왜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지 정도는 알고 시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린 이제까지 그런 것도 없이 그저 해야 하니까 하고, 남들이 하니까 했다. 엄밀히 말하면 승자독식이란 구조하에 합격생을 배출하기 위해서만 교육 시스템을 운영해 오지 않았는가. 이는 역으로 합격생을 배출하기 위해 그처럼 많은 사람을 불합격생으로 떨어트려 왔다는 얘기다. 너무 소모적이다 못해 말살적이기까지 하다. 거기에 우린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이 책이 그런 교육에 저항하라고 부추기는 책은 아니다. 이 책은 그저 저자의 공부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한 책일 뿐이다. 오히려 현실은 불합리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실존적이고 능동적으로 공부하라고 조언한다. 내용에 보면 부모를 떠나라는 말이 나온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공부를 해냈다면 비상한 머리와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을 것 같지만 저자는 똑똑하지도 않거니와 부모는 항상 싸우기만 했다고 한다. 부모가 서로 화목해도 부족 할판에 늘 싸웠다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저자는 어느 날 부모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물리적인 독립이 아니라 정신적인 독립을 한 것이다. 부모는 자신을 낳아준 것만으로 부모의 역할을 다한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겠다고 다짐했단다. 그것도 청소년 시절에.


공부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우리나라의 교과는 재미가 없다. 재미가 없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어쨌든 시스템에 맞추어야 다음 기회도 도모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 교과는 교과고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지식을 쌓아 가는 건 어떨까. 어차피 천재는 학교에서 만들어 주지 않는다. 천재는 어느 특정 분야에서 나오는 법인데 그 특정 분야는 전문 분야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 교과는 기본으로만 하고 자기 좋아하는 분야를 파라. 누가 아는가 천재가 될지. 농담이다. 말하자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가 어떤 환경에 처해있든 자신은 자신을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나의 중학교 3학년 때 국사 선생님이 생각이 난다. 사실 그 선생님은 아이들 사이에선 그다지 인기 있는 선생님은 아니었다. 선생님은 이제 청년을 지나 중년으로 접어들기 시작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더구나 고리타분한 국사다. 그런데 이 선생님은 다른 선생님과 좀 달랐다. 다른 선생님은 교과 이상을 벗어나는 적이 없었는데 이 선생님은 일단 가르치는 것을 너무 좋아하셨고 교과 이상을 가르쳐주셔서 중 3의 교실이었지만 일순간 어느 대학 강의실이 되기도 했다. 그 선생님은 단정하지만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그래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다. 공부는 그렇게 하는 것일 게다. 


저자는 학교 때 성적이 좋지 못했다고 하는데 난 그 말을 믿는다. 정말 아이들 중엔 종종 공부를 잘할 것 같은데 못하는 아이가 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은 진단 내리기를 머리가 나쁘거나 방법이 잘못됐다고 말한다.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부를 할 수 없는 건 아니다. 학교 공부는 못했어도 그 역시 책을 좋아했고 책을 통해 얻은 그 많은 인문학적 지식은 나중에 그가 학문의 길을 걷는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그는 그렇게 오래전부터 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배경이나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하는 일이 그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격언이 있다. '목수는 목수의 일을 함으로 목수가 된다.' 그러려면 변함없이 매일 그 일을 할 수 있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즉 루틴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또한 그것이 운을 만드는 길이 되기도 한다. 알다시피 행운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올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에게 오는 법이다. 그는 그가 교수가 될만한 자질과 배경이 있어서라기 보단 그의 루틴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자신을 가리켜 공부하는 노동자라고 했다. 공부하면서 노동하는 사람이 아니라 공부를 노동으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공부로 수행 또는 수도한다는 말일 게다. 우리가 오로지 수능이나 무슨 자격증만을 위해 공부하는 것과는 차원이나 자세가 다르다. 그는 10년마다 한 번씩 공부 계획을 짠다고 한다. 짤 때는 그저 만만하게 해낼 수 있는 정도로 짜는 것이 아니라 이게 가능하겠나 싶게 짠단다. 그 자신도 안 될 수도 있다는 걸 안단다. 하지만 그렇게 짜고 그는 하루하루 루틴을 실천하며 그걸 감당해 간다고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그 방대한 라틴어 사전이기도 하다.) 


유학을 하게 되면 언어 때문에 고생하는 건 차치하고라도 (그건 누구든 겪는 거니까) 그는 건강이 발목을 잡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가 안 되었다기 보단 건강관리에 대한 지혜와 요령이 생겼다고 한다. 난 일찌감치 공부의 뜻을 접었던 이유 중 하나가 건강 때문이기도 했다. 더 정확히는 건강염려증 때문이다. 괜히 공부한다고 암에라도 걸리면 어쩌나 했는데 뭐 무서워 장 못 담근다는 꼴이다. 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고 뜻을 세웠다면 그 길을 가 봐야 한다. 가다가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늑대가 울어도 먹이를 주지 말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늑대는 사람들이 갖는 걱정과 근심을 말한다. 그놈에게 먹이를 주면 어찌 되겠는가. 


공부는 암벽 타기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건강을 위해 때로 운동으로 스스로 다지는 것처럼 공부는 우리의 정신을 다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우린 하기에 따라선 최소의 수고만 하고 게으르게 살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바로 앎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스스로를 돌보지 않으면 짐승이 되어간다고 하지 않는가.


공부하는데 금지 언어가 있다. 바로 공부해서 남 주냐는 말이다. 공부로 경쟁하고 입신양명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아직 유효한 말이긴 하다. 그러나 이 책에선 그런 말은 해당하지 않는다. 저자는 오히려 공부해서 남을 주라고 한다.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에게 한 학생이 인류문명의 첫 신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부러졌다가 붙은 흔적이 있는 넓적 다리뼈'라고 했단다. 그것은 뼈가 부러진 사람이 회복할 때까지 누군가 곁에서 도와주었다는 흔적이고, 어려움에 부닥친 사람을 돕는 게 문명의 시작이라고 했다(319p). 앞으로의 우리의 공부는 이런 것이어야 한다.  


저자가 정말 공부 노동자를 자처해서일까, 그는 신학교 때 두꺼운 철학사 두 권짜리를 독파하기도 하고, 잘 사 보지도 않는 라틴어 사전을 번역하기도 하고 지금도 끊임없이 공부한다고 한다. 우리가 느낄 땐 참 쓸 때 없는 공부 같아 보인다. 더구나 라틴어는 사어가 아닌가. 그런 남아 알아주지도 않는 공부를 매일 아침 7시에 시작해서 밤 11시에 마친다고 해서 세븐 일레븐이란 별명도 얻었다. 그나마 이 별명도 최근에 떼었다고 한다. 건강이 받혀주질 않아서란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도 심기일전하여 다시 공부해야지 싶다. 뭐 꼭 공부란 게 학교나 학원을 가야 하는 건 아니다. 평생 공부하려면 결국 혼자 공부해야 한다. 저자가 마지막에 얘기하는 것도 독학이다. 그게 또 공부하는 노동자에 맞고. 그런데 이렇게 리뷰까지 써도 공부는 참 쉽지가 않다. 이 책에 은혜받아 오랜만에 어렵고 힘든 책에 도전해 보는 중이다. 그나마 나는 두꺼운 책 한 권인데도 갈수록 하루 동안 읽는 양이 점점 얇아지고 있다. 눈도 아프고 몸이 꼬이고 언제 다 읽을는지 모르겠다.


난 이 책을 읽기 전 그 강연이 너무 좋아 늦게나마 <라틴어 수업>을 읽었다. 알다시피 <라틴어 수업> 은 그가 모 대학에서 라틴어를 강의했던 것을 책으로 엮은 것으로 라틴어 격언이나 속담을 풀이하면서 저자의 생각을 덧붙인 것이다. 이 책은 그 연장이기도 하다. 라틴어에 관심이 없어도 한 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라틴어 격언과 함께 공부에 대한 깊은 울림과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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