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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수집가 Sep 29. 2021

개가 살지 않는 집(2)

개 집과 사람의 집

 우리 가족은 21년 전 지금의 집으로 이사 오면서 이제 더 이상 개는 키우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전까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서 살았고 개를 좋아했던 아버지 때문에 항상 개를 키웠다. 심지어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여전히 개를 키웠다. 그러다 아주 잠깐 개를 키우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개 두 마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죽거나 집을 나가 버린 것이다. 

 아버지는 늘 아침이면 마당을 쓸곤 했는데 거기엔 전날 녀석들이 싸놓은 똥오줌을 치우기 위한 것도 포함이 되었다.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그건 고스란히 엄마의 차지가 되었다. 아들 둘이 있어도 엄마 힘들 것을 생각해 대신 치우겠다는 아들은 없었다. 그러다 이왕 없어진 일부러 키우지는 않겠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얼마 안 있어 그 생각을 철회했다. 개를 키우지 않으니 집안이 더 삭막하고 밤이면 무서운 생각이 들어 다시 키워야겠다고 했다. 흔한 잡종개는 구하기도 쉬웠다. 누구를 통해 구했는지 기억할 필요도 없을 만큼.      

 그 개는 딱히 이름도 없었다. 그냥 삼순이라고 해 두자. 암컷이었으니. 갈색과 누런색이 섞인 점박이에 털이 짧았다. 삼순이를 키우던 먼저 주인이 녀석을 더 이상 키울 수 없게 되어 걱정하고 있던 차에 우리가 키우겠다고 하니 잘 됐다며 좋아라 했단다. 하지만 녀석으로선 전후 사정을 모르니 마음의 상처가 나름 꽤 깊었던 모양이다. 우리 집에 와서도 우리와는 눈 한 번 마주치지 않았다. 잡종견이라고 얕잡아 보면 안 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녀석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이래 가지고 서야 제대로 키울 수나 있을까 이래서 성견은 키우는 게 아닌데 했다. 더 놀라운 건  녀석은 개집이 있는데도 들어가지 않고 마당 구석에서 쪼그리고 잠을 잤다. 나중에 알았는데 개는 남이 쓰던 집에 절대로 들어가는 법이 없단다. 그 집에 누군가의 채취가 남아 있으면 안 들어간다는 것이다. 까탈스럽다고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새 집을 마련해 줬고 녀석이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기다려줬다. 

 녀석이 마음은 연 건 생각보다 오래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거의 한 달쯤 걸리지 않았을까. 아무튼 녀석이 마음을 열자 이렇게 명랑하고 성격이 좋은 줄 정말 몰랐다. 마음을 열었다고 우리가 특별히 더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안에서 뭔가의 인기척만 있으면 녀석은 폴짝 뛰고 그야말로 난리도 아니었다. 

 그렇게 4년쯤 키웠던 것 같다. 오빠가 집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해 사업을 확장시켰고 곧이어 IMF가 터졌다. 오빠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파산을 했고 결국 집을 팔아야 했다. 나는 그렇게 될 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전에도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게 해 준 적이 있었던지라 나는 이번만큼은 반대하고 나섰다. 하지만 이미 엄마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굳혔으니 내가 반대했다고 안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IMF가 아니어도 집집마다 이런 스토리 하나쯤 다 있지 않나? 누군가는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시키다 빚 만지고 집 팔아먹고 거기에 희생당하는 가족들. 그건 어느 드라마나 소설에 나오는 얘기가 아니다. 내 이웃의 이야기고 바로 우리 집의 이야기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아버지가 그랬을까. 하지만 아버지는 사시는 동안 가족들에게 그런 피해는 주지 않았다. 설혹 그렇더라도 당신이 일궈 놓으신 재산이다. 말아먹어도 누가 뭐랄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재산은 오래전에 분배가 된 마당에 엄마와 내가 공동명의로 된 집을 오빠가 자꾸 건드린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그럭저럭 무탈하게 굴러왔지만 그놈의 불경기가 문제다. 정말 불경기라면 뭔가의 방비를 해야 하는데 온탕 속의 개구리라고 사람들은 그러면서도 막연하게 뭔가의 길은 있겠지 하며 할 일은 다하고 산다. 오빠라고 다르지 않았다. 경기가 안 좋으니 더 이상의 대출은 삼가고 있는 거나 잘 추스르며 앞으로의 전망을 지켜봐야 한다. 나름 신중한 성격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똑똑한 건 아니었다.          

 자수성가한 아버지 그늘에서 자랐고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고작 스물여덟이었다. 아버지가 거의 갑자기 돌아간 것이다 다름없었기 때문에(암 진단을 받은 지 한 달 반 만에) 전혀 경험이 없던 오빠가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았지만 얼마 안 있다 정리를 하더니 친구와 동업으로 카페를 차렸다. 그런데 그게 의외로 수입이 꽤 짭짤했던 모양이다. 이미 돈맛을 봤고 거기다 남자들 묘한 허세까지 더해져 남은 망해도 나는 안 망한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작용했을 것이다. 더구나 동업이었으니 혼자 망하는 것도 아닐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오빠와 동업한다는 친구를 나도 알고 있다. 그는 오빠와 대학 동기였다. 오빠가 사수를 하느라 대학을 늦게 들어갔고 그 친구도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둘은 동갑내기였다. 언젠가 우리 집에 밤늦게 와서 잠도 자고 간 적도 있다. 경상도 억양이 강했고, 숫기가 좋아 엄마한테 한껏 점수를 따기도 했다. 엄마에겐 그런 아들이 없었으니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수선 맞고 시끄러운 사람은 딱 질색이었다. 

 대화중 나를 호명하기도 했다. 직접적으로 내 이름을 부른 건 아니지만 여동생, 여동생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알 것 같았다. 그는 오빠와 엄마한테 잘 보여서 나와 어떻게 좀 잘해 보려고 수작을 부리는 거였다. 친구와 처남 매부가 되는 것도 한국적 상황에선 흔히 그리는 그림이기도 했으니. 하지만 그는 확실히 잘못 집었다. 말했다시피 난 그렇게 시끄러운 사람은 좋아하지 않았고, 친구끼리 처남 매부가 되는 것도 먼저 오누이끼리 어느 정도 사이가 좋아야 가능하다. 오빠와 나는 한 집에 살아도 소 닭 보듯 하는 사이란 걸 그가 알리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저렇게 한껏 들떠 있으니 것도 우습다 했다. 그러니까 난 그를 목소리로만 알뿐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는 코빼기도 본 적이 없다. 오빠는 바로 그 친구와 동업을 한 것이다. 모르긴 해도 오빠가 아버지가 했던 자동차 정비업을 정리하고 카페를 차린 것도 그 친구의 입김이 작용했을 거라 쉽게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망하고 나니 그가 어떤 사람일지 더 잘 알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말이 많고 풍치는 스타일이었으니 그는 동업하는데 자본을 댄 것이 아니라 입술을 댓을 것이다. 왜 그런 사람 있지 않은가, 실속은 없으면서 말로 한 몫하는 사람. 자본을 대도 아주 작게 댔겠지. 그야말로 순진한 오빠한테 빌붙어서 단물 쪽쪽 다 빨아먹고 어렵게 되자 나 몰라라 튀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 집이 그렇게 싼 집이 아닌데 빚으로 다 메꾸고 그때 돈 5천만 원 겨우 남겼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동업을 했으면 시작도 반반이고, 끝도 반반이어야 하지 않는가. 오빠는 그 후 그 친구와 결별한 걸 보면 그건 확실했다. 병신. 돈 앞에서 우정이 어디 있다고.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우리 집을 산 사람이 당장 들어와 살 것은 아니고 2년 후 집을 다시 지을 것이라며 전세로 살려면 살라고 했다. 그거에 무슨 선택이 있겠는가. 당연히 더 살아야지. 그만도 23년을 살았다. 난 우리 집이 그렇게 추락할 수도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나마 당장 이사를 가지 않아도 되니 다소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당장 이사를 가면 수중에 있는 돈으론 단독주택은 살 수 없을 것이다. 마당이 있어야 삼순이를 키우지 않겠는가. 그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그 또한 유예시킬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그때 되면 뭔가의 방법이 있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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